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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국보(9) 황초령 진흥왕 순수비... 금석학 대가 추사의 자취 남아
북한의 국보(9) 황초령 진흥왕 순수비... 금석학 대가 추사의 자취 남아
  • 윤형선 기자
  • 승인 2022.04.07 08:2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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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료가 부족한 고대사 연구 생생한 금석문으로 채워
추사 김정희 부서진 황초령비 복원에 힘기울여...진본은 함흥박물관 소재
신라 진흥왕의 영토확장 업적을 기록한 황초령 순수비. (사진 조선의오늘)
신라 진흥왕의 영토확장 업적을 기록한 황초령 순수비. (사진 조선의오늘)

황초령 순수비(巡狩碑)는 북한의 국보 제 110호로 신라 24대 진흥왕(재위 540~576)이 고구려를 공격하고 개척한 영토를 직접 다녀보고 이를 기념하여 세운 석비이다. 현재까지 발견된 것은 총 4점으로 남한에는 국보 제33호 창녕 척경비, 국보 제3호로 지정된 북한산 순수비가 있고 북한에는 황초령외에 마운령 순수비가 있다.

진흥왕 순수비는 각 비마다 내용이 조금씩 다르지만, 대체로 왕의 덕과 업적을 칭송하는 내용과 함께 순수를 하게 된 이유, 해당 지역에 베푸는 조치의 내역, 왕을 수행했던 인원 명단 등이 적혀 있다.

순수비의 발견은 사료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고대사 연구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고 있다. 특히 삼국사기’, ‘삼국유사가 후대인 고려시대에 편찬되어 한계를 품고 있는 것에 비하면 금석문은 거의 대부분 당대에 쓰여진 생생한 기록이기 때문에 사료적 가치가 높다. ‘삼국사기신라본기 진흥왕조에는 신라의 동북국경을 비열홀주(지금의 함경남도 안변)로 기록하고 있는데 황초령비의 발견으로 안변을 훨씬 넘어 함흥지역까지 이르렀음을 확정할 수 있게 되었다.

비문에서 진흥왕은 태왕(太王)’이나 ()’으로 자신을 호칭하여 황제국의 위상을 드러내고자 하였고, 연호를 사용하여 제왕의 권능을 나타내고 있다. 그리고 새로운 영토를 순행하면서 민심을 살펴 노고를 위로하고, 나라를 위해 충절을 다한 공이 있는 무리와 새로 확보한 지역의 백성들이 왕국을 위해 충성하고 공헌하는 이들에게는 관직과 물질적 보상을 내릴 것을 약속하고 있다.

황초령 진흥왕 순수비 탁본들의 모습(사진 한국학중앙연구원)
황초령 진흥왕 순수비 탁본들의 모습(사진 한국학중앙연구원)

그리고 진흥왕의 순수에 동행한 사문도인 법장과 혜총, 거칠부를 비롯한 많은 관직 신료들의 이름을 밝히고 있다. 따라서 진흥왕순수비는 진흥왕 재위 시 영토를 확장한 것을 대내외에 알리고 새롭게 확보한 지역의 민심을 달래며 이들의 자발적인 복종을 요구한 것으로, 왕도정치의 이념을 알리는 교화의 성격을 담고 있다. 또한 왕을 수행했던 신하들의 명단은 당시 신라의 정치군사지방 제도에 대한 정보를 제공해 주는 귀중한 자료이다.

황초령비는 조선 중기 선조 대에 신립이 북병사로 있던 당시 탁본한 기록이 남아있어 선조 시대까지는 황초령비가 온전히 전해진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하지만 각 곳에서 탁본을 요구하자 노역에 지친 현지 백성들이 벼랑 아래로 밀어뜨려 몇 부분으로 쪼개졌다.

순조 때 북한산 순수비를 발견한 추사 김정희는 함경도로 유배오자 후배인 관찰사 윤정현에게 부서진 황초령비의 복원을 강력하게 요청했다. 이에 윤정현은 쪼개진 조각들을 수습해 황초령 고개 바로 아래 중령진에 비각을 세우고, 김정희가 써준 현판을 걸었다. 이때 일로 지역 이름도 진흥왕에서 딴 진흥리가 되었다.

황초령 진흥왕 순수비는 순조때 김정희의 노력으로 복원되어 비각이 세워졌다. 비각과 김정희가 쓴 현판모습(사진 한국학중앙연구원)
황초령 진흥왕 순수비는 순조때 김정희의 노력으로 복원되어 비각이 세워졌다. 비각과 김정희가 쓴 현판모습(사진 한국학중앙연구원)

1931년 나머지 한 조각을 다시 발견해 같이 합쳤고, 이렇게 다시 이어붙이고 깨지기를 반복해서 현재는 판독할 수 없는 글자가 많다. 현재 비석 실물은 지금은 함흥시에 있는 함흥역사박물관에 보관 중이고 남한에는 모조품과 탁본들이 여러 박물관에 나눠져 있다.

일제강점기 시절 황초령비를 연구했던 일본인 학자들은 신라가 이렇게 북쪽까지 북진했을 가능성이 없다면서 순수비 자체가 후대의 위작이라거나 고려시대 윤관의 여진 정벌 때 정당성을 강조하기 위해 남쪽 어딘가에 있던 비석을 북쪽 황초령에 옮겼을 것이라는 설을 주장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보다 더 북쪽인 마운령에서 순수비가 발견되어 설득력을 잃었다.

참고문헌: 신라 진흥왕의 통일 염원을 담은 순수비박대남 전 국립문화재연구소 미술문화재연구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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