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구, 김규식 선생 발자취와 일제 강점기 여성 노동자 강주룡의 고공농성 장소로도 알려져
북한의 국보 19호인 을밀대는 고구려 시대 평양성 누대 중 하나로 현재는 평양시 중구역 금수산 을밀봉 지역에 위치해 있다.
을밀대 이름의 유래에는 다양한 설화가 있는데, 을밀선녀(乙密仙女)가 이곳의 아름다운 경치에 반해 하늘에서 내려와 놀았다는 설화가 있고, 또 다른 설화로 6세기 무렵 평양성을 세울 때 을지문덕 장군의 아들인 을밀 장군이 이 곳을 지키며 싸웠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외에도 순 우리말인 '웃미르터' 또는 '웃밀이언덕'을 이두로 음차한 것이라는 설이 있다.
누대의 구조는 웃밀이언덕 벼랑에 11m 가량의 축대를 둘러쌓았고 현재의 정자는 조선 숙종 40년(1714년)에 축대를 보수한 것이다. 1960년에 다시한번 전반적인 보수가 이루어졌으며 예서로 쓰인 현판은 조선 말기~일제강점기 서북지역의 서예가였던 노원상(1871~1926)이 쓴 것이다.
기본적으로는 군사적 목적으로 세워진 망루이지만 을밀선녀가 경치에 반했다는 설화로 알 수 있듯이 을밀대 주변의 빼어난 경관을 관람하는 누각의 역할도 맡고 있으며, 특히 을밀대 아래로 흐르는 대동강과 하중도인 능라도의 풍경과 사방으로 트인 평양평야가 매우 수려하다. '평양8경' 중 하나로 꼽히기도 하며 매년 봄마다 아름다운 봄 풍경을 관람하러 오는 관광객으로 붐빈다.
을밀대는 위 사진처럼 김구, 김규식 선생의 발자취외에 한국 노동운동 역사에 큰 의미를 부여한 곳이다. 일제강점기였던 1931년 5월 29일 고무 노동자였던 강주룡 열사(1901~1932)가 을밀대 지붕에서 한국최초로 고공 단식농성을 벌였기 때문이다. 당시 평양 고무공장 여성 노동자였던 강주룡 열사는 2천여 명이 참여하는 평원고무공장 파업을 주도하던 중 일경의 탄압으로 공장에서 쫓겨나자 을밀대 지붕으로 올라가 무산자의 단결과 노동생활의 참상을 고발했다.
강 열사는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끝까지 임금 감하(삭감)를 취소치 않으면 나는 근로대중을 대표하여 명예롭게 죽을 것이며, 누구든지 이 지붕 위에 사다리를 대놓기만 하면 나는 곧 떨어져 죽으려 한다"고 당당하게 밝혔다. 그는 농성 8시간 만에 경찰에 의하여 강제로 끌려 내려왔음에도 옥중에서도 단식투쟁을 벌이는 등 의연한 모습을 보였다.
결국 강 열사는 해고됐지만 고무공장의 임금삭감을 막아내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강 열사는 잦은 단식투쟁으로 인하여 몸이 쇠약해져 끝내 사망했다. 강 열사를 비롯한 여성노동자들의 처절한 생존권 투쟁은 이후 노동운동이 항일민족운동으로 연결되는 촉매제 역할을 했다.
오늘날 남한의 서울시민들에게는 평양의 을밀대 누각 보다는 그 이름을 딴 평양냉면 전문점이 유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