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신뢰로 시작한 베를린의 경험을 통해 본 남북교류
작은 신뢰로 시작한 베를린의 경험을 통해 본 남북교류
  • 이재영 기자
  • 승인 2019.10.02 15:4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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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자유대학 한국학과장 겸 한국학연구소장을 맡고 있는 이은정 교수는
1984년 독일로 유학하여 분단 독일의 통일 과정을 생생히 지켜보았다.
2008년, 이은정 교수는 베를린자유대 한국학연구소 설립을 주도했다.
설립 펀드를 조성하고 커리큘럼을 직접 짜는 등 땀흘린 보람이 결실을 맺고 있다.
한국학연구소는 첫 신입생 20명으로 출발하여 현재는 매년 200명 이상의 학생이 입학할 정도로 성장했다.
베를린자유대 한국학과는 한국의 역사, 문화, 정치, 경제 등의 사회과학 분야에서
한국연구를 수행해 독일 학계에서도 주목받고 있다.

2012년, 베를린자유대학은 북한의 조선시대 서원(書院) 연구를 위해 방북한 후 김일성종합대학과 MOU를 체결, 컨퍼런스 개최와 학술교류를 이어오고 있다. 2018년 10월에도 베를린자유대학과 김일성종합대학은 평양에서 인문사회학 분야 교류협력에 관한 의정서를 교환했다. 

지난 9월 2일 민주당 이인영 원내대표와 서울연구원 주최로 열린 ‘동서베를린 경험으로 본 지방정부의 남북협력 방안 모색’ 세미나에서 이은정 교수는 독일의 상하수도, 우편, 방송 일상생활의 교류를 소개했다. 

이 교수는 우리 사회에  ‘통일 논의’가 왕성하지만 정작 사람과 사람의 만남이 만나는 근본적인 성찰에 소홀하다고 지적한다. 두 체제가 무서움 없이 긴장하지 않고 살아가는 방법을 모색하는 것이 그 출발점이라고 말한다. 또 이론을 너무 많이 만들어낸다고도 했다. 독일의 사례를  제각각으로 이해해 ‘통일전망’을 내놓는 일이 과연 옳은가. 이은정 교수는 독일의 시각으로, 또 한편 분단의 고통이 끝나기를 바라는 한국인의 시선으로 남북문제에 접근 방안을 내놓는다.  


남북한 간 ‘일상 속의 교류’가 중요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독일은 우리와 정서가 다르고 우리처럼 적대관계가 오래 되지 않았기에 두 체제가 쉽게 융화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닌지요.

적대관계가 오래되었기 때문은 아니라고 봐요. 독일도 1947년 경 원자폭탄 폭격 직전의 위기를 겪었습니다. 한국전쟁을 지켜보면서 “우리는 저렇게 하지 말자”는 자각이 일면서 극한 대립을 멈추었지요. 

독일의 동방정책은 작은 일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빌리 브란트 베를린 시장은 1961년 “크리스마스 방문을 허락하자”며  ‘통행증 협상’을 시작했습니다. 성탄절 1일 비자를 허락하고 2차 협상 때 48시간으로, 3차 협상 때 72시간으로 방문 기간을 늘렸죠. 그 다음에는 부활절, 장례식 방문으로 점차 기회를 확대했습니다.

동서독이 상대 체제를 인정하지 않았지만 이후 6년간 약 540 만 건의 상호 방문이 이뤄졌습니다. 작은 시도가 동서독 간의 만남을 확대시켰어요. 막상 해보니까 문제되지 않고, 신뢰가 쌓이면서 빌리브란트 수상의 신동방 정책이 추진되었습니다. 처음부터 큰 그림을 그리지  않았습니다.

 
서울연구원과의 세미나에서 구체적인 사례를 제시하셨습니다. ‘작은 교류’가 어떤 방면에서 시작되었는지,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요.  

이번 서울연구원과 공동 연구한 내용도 사람들 간의 교류가 적대적이지 않은 관계로 발전할 수 있었던 독일의 과정을 살펴보고자 한 거였어요.

예를 들어 베를린은 장벽이 설치된 후 상하수도, 쓰레기, 교통, 방송, 우편물 모든 것이 단절되었어요. 그런 것들을 연결시키면서 긴장이 완화된 사례를 살펴본 거죠. 베를린 하수도를 둘러싼 재미있는 사례를 들어볼게요. 베를린은 18~19세기 근대화 과정에서 공중위생 개선을 위해 최첨단 기술로 하수 시설을 만들었습니다.

연장 2000킬로미터가 넘는 촘촘한 하수터널을 인위적으로 나누는 것은 불가능한데도 동서독 당국은 하수터널을 분단시키려고 했습니다. 물이 흐르는 것을 분단시킬 수 있나요? 불가능했습니다. 이때 강의 흐름을 관리하기 위해 서로 만난 동서독 기술자끼리 친구가 되었고, 통일 후 독일 언론을 통해서도 소개되었습니다.

 
독일처럼 우리도 긴장완화에 시간이 흘러야 하지 않을까요. 젊은 층의 통일에 대한 관심이 줄어들고 있습니다.

 20년이 될 수도 있고 10년이 될 수도 있고 그건 아무도 모릅니다. 독일 통일도 굉장히 갑자기 다가왔습니다. 저의 독일 친구들은 젊은 시절 “동독보다 프랑스가 더 친한 나라”라고 느꼈다고 합니다. 그런데 막상 통일이 눈앞에 다가오자 “나 통일 싫어”라고 말한 서독 청년은 없었습니다. 

1989년 8~ 9월 무렵에도 독일에서는 통일 이야기가 나오지 않아요. 장벽이 무너진 11월 9일쯤 되니까 “이상하다. 변화가 오는 것 아닌가” 하는 느낌은 가졌지만 실제로 통일 이야기가 나온 것은 장벽 무너지고 난 이후입니다.

서독의 정치인들도 통일 이야기를 꺼내지 않고 가슴 속에 묻어두었다고 해요. “통일이 되면 좋겠다.”고 마음속으로만 생각했다고 지금 와서 고백합니다. 하지만 당시에는 아무도 입에 담지 않았어요. 상대의 자존감을 무시하면서 일방적인 통일론을 이야기하는 우리와는 많이 다르죠.

이은정 교수는 ‘통일비용’ 논쟁을 예로 들었다. 일본의 장기신용은행이 “한국은 통일비용을 감당할 수 없을 것”이라는 요지의 보고서를 내보낸 후 주류 언론이 받아쓰면서 ‘통일은 비용이 많이 든다.’는 인식이 자리 잡았다. 동서독의 사례를 전제로 한국의 통일 비용을 계산한 것이다. 이은정 교수는 독일이 추진한 일상적인 교류의 의미를 살피지 않고 통일 후 야기되는 문제점만을 제기하는 것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북한은 동독, 남한은 서독’일 것이라는 전제로 어느 편에서 체제통일을 이루느냐를 연구하는 것도 마찬가지로 본다. 나뉜 사회를 하나의 성공적 사회로 만들기 위한 노력이 가장 필요하다고 말한다. 

 

현재 북한 방송을 소개하기 위해 설립된 통일TV의 인허가가 나지 않고 있고, 북한 언론을 접하려면 ‘특수자료’를 열람할 수 있는 자격을 얻어야 합니다.

서베를린에서는 동독 방송 시청이 가능했어요. 우리가 북한 방송을 먼저 푸는 방법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어요. 당시 독일 젊은이들은 “재미없는 동독 방송이지만 옆 나라가 내 삶을 위협하지는 않는다.”는 생각을 방송을 시청하면서 갖게 되었죠. 

 

한국이 세계에서 유례를 찾기 힘든 분단국가로 남아 있습니다. 그런데도 이산가족 상봉조차도 제대로 안 되고 있습니다.

빌리 브란트는 베를린 시장일 때 주민들이 당하는 고통을 어떻게 하면 줄이느냐에 관심을 쏟았어요. 장벽이 세워진 후 동서베를린의 왕래가 완전히 단절되자 빌리 브란트 시장은 두 가지 일을 했어요. 첫째, 장벽으로 인해 죽은 사람들을 기록하자. 두 번째, 서로 만나게 하자는 거였어요. 그리고 3년 만인 1961년 성탄절 방문을 성사시켰죠. 

빌리 브란트는 “분단의 아픔을 눈앞에 두고 아무것도 하지 않을 수 있느냐”는 생각을 가졌던 사람입니다. 그는 수상이 된 후 “나의 경력은 하향곡선을 그렸다”고 말해요. 원래 음악가였거든요. 음악가에서 변호사로, 또 독일 수상까지 되었는데 자신의 경력 중 정치인이 최악이라고 말했습니다.

빌리 브란트처럼 낮은 자세로 일하는 사람들, 비판적인 사람들에게 독일 국민이 기회를 준 거죠. 수상 비서실장이 동독 간첩으로 드러났을 때도 그 일로 독일사회가 빌리 브란트의 모든 면을 단정 짓지 않았어요. 독일 언론이 분단을 도구화화지 않았고, 독일 사회 내부의 비판적 지성이 제 목소리를 냈습니다. 

물론 아데나워 수상은 할슈타인 독트린을 발표하는 등 반공 이념이 철저했습니다. 하지만 민주주의 원칙을 지켰습니다. 선거 때는 사민당이 기민당에 대해 “너희는 소련 공산당의 7중대”라는 식으로 비난했지만, 이런 공격에 대해 비판적으로 성찰하는 목소리가 더 컸어요.

 

북한이탈주민은 ‘하나원’ 연수를 마친 후 사회적응이 쉽지 않습니다. 최근 북한이탈주민 모녀가 외롭게 사망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북한이탈주민 모녀의 현실이 너무 가슴 아픕니다. 얼마 전 제주도 섬머스쿨에 참여한 한국 학생들이 “북한이탈주민은 난민처럼 취급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을 듣고 깜짝 놀랐어요. 저는 “북한 사람도 헌법에 대한민국 국민으로 규정한다. 그들을 난민이라고 규정해야 될 이유가 없다.”라고 말했어요.

우리가 그들을 도구화한 적은 없는가, 특정 정치그룹에 속해야만 그들의 자아실현이 가능했던 것은 아닌가 싶어요. 북한이탈주민을 ‘탈북자 그룹’으로 바라보면 그들이 우리 사회에 녹아들 수 없어요. 서독으로 이주한 동독 사람들은 자연스레 서독사회의 일원이 되었습니다. 잘 살아보려고, 자아를 실현하려고 했을 텐데 우리는 북한이탈주민을 구분해버립니다. 한 인간의 삶을 보장해야겠다는 마음으로 다가가지 못하는 우리에게 문제가 있다는 인식조차 하지 않는 현실이 안타깝습니다. 

 

베를린자유대학의 북한교류 내용이 궁금합니다. 북한도 독일의 사례를 연구하는지요.

북한도 독일 통일 과정을 자세히 공부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저희 베를린자유대학의 북한교류는 학생 교류, 연구자 교류 그리고 공동연구 프로젝트 세 단위로 나뉘어 있어요. 저는 서원 연구를, 다른 팀들은 독일어 사전 만들기 등 각자 맡은 프로젝트를 진행합니다.

북한을 방문하기도 하고, 곧 북측에서 독일로 올 예정이기도 합니다. 지난해 추석 때 방문했어요. 북한에서는 추석명절을 지내야 하니까 매우 바쁘게 움직였고 조상을 기리는 성묘도 합니다. 북한에는 ‘반미구호’가 사라졌고 학자들은 진지하게 자기분야에 몰두한다는 것을 느꼈어요.

한국에 나와 있는 독일의 아데나워 재단은 법률과 언어, 에버트 재단은 외교, 한스자이델 재단은 자연환경보호, 나우만 재단은 경영 방면에서 북한과 교류협력하고 있습니다. 

저는 북측과 학문교류를 할 때 “이 사람이 나와 전공분야에서 대화할 수 있는 지점이 어디인가”를 찾아 그것을 중심으로 대화합니다. “북한이 이럴 것이다”라는 틀을 벗어나면 많은 대화를 할 수 있습니다. 2,200만 명이 사는 국가에서 의사들은 치료에 몰두하고 농민은 농사에 전념합니다.

 

우리는 남북관계에 미치는 미국의 영향력이 커서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이 제한되어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독일은 4대 전승국이 점령해서 2+4(동서독 + 프랑스, 영국, 러시아, 미국) 네 나라가 승인해야 통일이 가능했습니다. 미테랑 프랑스 대통령은 “독일을 너무 좋아해서 두 나라가 있는 게 좋다”는 식으로 두 개의 독일이 합쳐지는 걸 바라지 않았어요.

마가렛 대처 영국 수상은 마지막 2+4 회담이 모스크바에서 열렸을 때 모스크바 영국 대표에게 사인하지 말라고 지시했을 정도였어요.

독일에 비하면 한국은 정치적 선택이 자유로운 나라입니다. 남북한이 “우리 내일 통일할거야.”라고 했을 때 법적으로 안 된다고 막을 수 있는 나라가 없어요. 독일은 안 되는 걸 되게 만든 거고, 우리는 할 수 있는데도 미국 때문에 안 된다고 생각하고 있는 거죠. 독일의 사례를 보고 안 된다고 할 게 아니라 사례가 없으면 우리가 만들어 나가면 됩니다.  

 

한국정부는 ‘흡수통일’ 기반 위에서 대화를 추구했지만 안 된 경우가 많습니다.  

남북문제 해결 대안으로 ‘전쟁’이 거론된다는 자체가 놀라운 일입니다. 어떻게 전쟁을 하나의 옵션으로 볼까, 1,2차 세계대전을 겪고 한국전쟁을 겪었는데도 불구하고 한국에서 전쟁을 하자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습니다.

불과 2년 전 트럼프-김정은 두 지도자가 핵무기 사용을 언급할 때 서독 학부모들의 전화가 빗발쳤어요. 한국에 교환학생으로 가 있는 자녀를 데려와야 하지 않느냐고. 당시 독일 언론이 한반도의 전쟁가능성을 물어보기에, 저는 “전쟁이 장난이냐. 전쟁을 부추기고 싶냐”며 화를 내며 말했어요.

그 후로 2년이 지난 지금, 아무도 전쟁 이야기를 하지 않아요. 엄청난 변화가 온 것을 잊어버리고 있습니다. 2017년 7월 문재인 대통령은 북한의 평창올림픽 참여를 제안했습니다. 이어 북한의 신년사가 나오고, 4.27 정상회담과 북미정삼회담으로 이어지면서 한반도의 전쟁 위협이 사라지고 평화 국면이 시작되었습니다. 한반도를 둘러싼 위기가 반전된 소중한 역사를 왜 폄훼하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평화는 작은 변화에서 시작한다. 일상에서 시작되는 평화는 어렵지 않다. 이 교수는 작은 일부터 북한과의 교류를 쌓아나가고 있다. 

“나는 당신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당신이 다른 의견을 말할 자유를 지켜주기 위해 내 목숨을 바칠 수 있다.” 

계몽주의 지식인의 격언을 들려주며 이 교수는 동서독이 서로 의견이 달랐지만 적대감을 확산시켜 기득권을 유지하려 하지도 않았다고 강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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