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진선봉 경제특구의 어제와 오늘
나진선봉 경제특구의 어제와 오늘
  • 이재영 기자
  • 승인 2019.08.23 15: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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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12월, 북한이 최초로 자유무역지대로 선포한 나진경제특구는 북한이 시장기능을 인정한 경제관리 방식이 도입된 최초의 경제지역 특구다. 1998년까지 LG상사 등 한국 기업들도 나진선봉 특구에 투자했다. 나진선봉 특구의 어제와 오늘을 이찬우 교수의 글을 통해 짚어본다.

 

‘황금 삼각주’라 불리는 ‘나진 선봉경제특구’(이하 나선특구). 두만강 하류에 위치한다. 중국과 러시아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지역이다. 

1991년 12월, 북한은 계속되는 경제난을 타개하기 위해 이곳을 최초의 자유무역지대로 선포했다. 외국 자본과 첨단기술 유치가 절실했기 때문이다. 중국의 경제 특구를 본떠 동북아시아의 핵심 물류기지 역할을 구상한 것이다. 이 특구는 북한이 시장기능을 인정한 경제관리 방식이 도입된 최초의 경제지역 특구이기도 하다.

북한은 나선특구 활성화를 위해 노력했다, 법률과 규정을 정비하는 한편 투자유치를 위한 각종 설명회를 개최했다. 또한 다른 나라의 여러 성공사례를 적용하려고 노력했다.

그럼에도 나진특구는 아직 북한이 의도했던 결과를 도출해 내지 못하고 있다. 여기에는 북한의 원만치 않은 대외관계 등 여러 이유가 있을 것이다.

현재까지 답보상태에 있는 나진특구. 그 성장의 가능성은 있는 것인지. 지금도 많은 전문가들의 이목이 쏠려 있다.

여기서는 이찬우 교수가 바라보는 나선특구는 어떤 곳이지 살펴본다. 

(이찬우 일본 테이쿄 대학 교수의 <북한경제와 협동하자> 요약)

 


 

경제특구 - 자주적 개발

북한이 대외투자를 유치하여 경제발전을 추구하려는 법제도를 구상한 것은 198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1984년 9월에 제정한 ‘한영법’이 그 성과물이다. 이 법은 중국의 개혁·개방정책의 영향을 받았다. 중국은 1979년에 영어의 ‘Joint Venture’를 합자경영이라고 번역한 ‘중외합자경영기업법’을 제정하여, 자국기업이 외자와 공동으로 합영기업을 설립하여 운영하는 것을 법적으로 허용하였다. 

북한의 합영법도 기본적으로는 중국의 법을 받아들인 것이지만, 그 목적은 중국과 달랐다. 즉 북한은 합영법이 ‘개혁·개방경제로 진행’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립적 민족경제를 건설하기 위해 외국과의 경제·기술교류와 협력을 할 목적’으로 제정되었다고 설명하였다(《조선중앙통신》 1984년 10월 15일).

그래서 북한은 1980년대 말까지는 중국처럼 경제특구를 만들어서 합영법을 실행하지 않았다. 당시 북한의 중앙인민위원회 경제정책위원회 윤기복 부위원장은 “중국에서 경제특구를 설정한 것은 중국의 실정에 맞는 것이다. 우리나라는 경제특구의 설정이 필요 없다”(《조선중앙통신》 1984년 10월 15일)라고 말했다.

그러나 1990년대에 들어서 상황이 바뀌었다. 즉, 사회주의경제권이 무너져 국제시장경제와 교류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생산력과 기술의 발전을 위해 중국처럼 경제특구를 만드는 정책으로 방향을 전환한 것이다. 그 첫 계기는 중국이 적극적으로 제기하여 UNDP(유엔개발계획)가 중심이 되어 러시아, 한국, 몽골 등과 함께 다자간 협력으로 추진하기 시작한 두만강지역 개발계획에 참여하는 것이었다. 

이 계획의 비전은 두만강 하류지역에 국경을 맞대고 있는 중국, 러시아, 북한 세 나라가 토지를 제공하여 다자간 통합경제특구를 만들고, 한국, 몽골, 일본 등이 참여하는 다자간 공동개발조직을 만들어 300억 달러를 투자하여 인프라와 물류 및 산업, 관광단지 개발을 통해 냉전시대 해체 후의 모델사업으로 발전시키자는 것이었다. 중국·북한·러시아·남한·몽골 등 5개국 정부가 참가하였고 일본정부는 끝내 참여하지 않았다. 

 

1990년대 경제특구-나진선봉

북한정부는 1991년 7월에 몽골의 수도 울란바토르에서 개최된 UNDP 제 1차 동북아시아 소지역 개발조정자회의에 참여하였다. 그 회의에서 북한은 두만강 하류지역에 있는 나진선봉(현재의 나선시) 지역에 경제특구인 자유경제무역지대를 창설할 계획을 발표하였다. 

이어서 10월에 UNDP의 제2차 개발조정자회의가 북한의 평양에서 개최되었다. 직후인 12월 28일에 북한은 정무원결정 74호로 ‘나진선봉자유경제무역지대’를 선포하고 나진항, 선봉항, 청진항을 자유무역항으로 지정하여, 동지역에 대한 외국투자기업에 기업소득세 감면, 관세 감면 등과 같은 우대정책을 취할 것을 정식으로 결정하였다. 

북한에서 처음 나온 경제특구 정책의 내용은 나진선봉지대를 ‘특혜적인 무역 및 중계수송과 수출가공, 금융, 서비스지역’(자유경제무역지대법 제2조)으로 개발하는 것이었다. 북한정부는 1993년 경제특구와 관련한 국토종합건설계획을 수립하고 외국인투자법, 합작법, 외국인기업법, 외국인투자은행법, 외국인세금법 등 일련의 투자관련 법률도 정비하면서 개발계획을 본격적으로 추진하였다. 

북한은 경제특구를 개발하는 것으로 정책을 전환한 것에 대해 동북아시아지역에서의 경제협력을 통한 경제발전과 안전보장을 지향하는 것으로 설명하였다. 이는 김일성종합대학의 김수용 교수가 1995년 10월에 도쿄 강연에서 북한의 대외경제정책을 설명한 데에도 나타난다. 

“1990년대에 냉전구조의 완화로 이념을 넘어선 경제교류가 세계적인 추세로 되고 또한 북한의 대외경제교류의 70%를 차지해온 사회주의권의 붕괴가 북한의 자립적 경제 건설노선의 정책변화를 요구하게 되었다. 국제경제발전의 필요성과 교류협력이라는 세계경제의 추이에 따른 주객관적인 조건으로 1991년 12월에 라진선봉자유경제 무역지대가 창설되었다.”

그러나 북한의 경제특구정책은 중국과 같은 방향으로 가지는 않았다. 나진선봉 경제특구를 포함하는 두만강지역개발계획에서 중국 정부와 UNDP는 다자간 공동개발을 우선하는 국제협력의 틀을 추구하였다. 반면에 북한은 다자간 협력 틀보다는 자국의 자주권을 중시하는 형태로 자국중심의 국제협력을 추진하는 입장이었다. 

결과적으로 UNDP가 추진한 두만강지역개발계획에 대해 북한은 러시아와 함께 국제공동관리에 의한 공동개발안을 거부하고 각국이 독자로 경제특구를 설치하고 각국의 필요에 따라 협력개발을 하는 입장을 취하였다. 결과적으로는 북한의 입장대로 되었다. 

그런데 ‘까마귀 날자 배 떨어진다.’는 속담이 있듯이, 북한이 나진선봉 경제특구 정책을 실시하자마자 미국이 북한의 ‘핵개발의혹’ 문제를 제기하였다. 결국 북한이 1993년 3월에 NPT(핵확산방지조약)을 탈퇴한다는 선언을 하면서 북미 간의 핵 위기가 시작되었다. 

1994년 7월에 미국이 북한을 폭격할 것이라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로 핵 위기가 심각해지나 미국의 카터 전 대통령이 평양을 방문하여 김일성 주석과 회담하고 전쟁 위험을 해소하면서 10월에 북미 간의 ‘제네바 합의’에 따라 핵 위기가 봉합되었다. 1995년부터 북한은 대외경제면에서 경제특구정책을 다시 추진할 수 있는 상황이 되었다. 

1990년대 중반의 경제위기의 상황 속에서 북한은 선군정치를 하면서도 나진선봉에 대한 경제특구 정책을 계속 유지하였다. 외자유치는 중국기업들 외에는 태국기업이 통신센터 건설, 홍콩기업이 카지노 호텔, 일본의 조총련계 기업이 수산물가공 분야에 투자하는 정도였다.

2000년대까지 나진선봉 특구에 대한 외자의 투자계약액은 5억 2천만 달러로 이중 투자실행은 2억 2천만 달러 정도였다. 북한정부는 도로, 공업용수, 전력 등 중요한 인프라 건설에 투입할 국내자금이 없었던 터라 그 개발자금을 외자기업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시장기능 인정한 경제특구

중국 이외의 외자기업들은 북한의 투자환경이 부실하다 하여 투자에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래도 북한정부는 경제특구의 투자환경을 개선하기 위해 1997년 6월에 나진선봉에 대해 △투자관련 권한을 나진선봉지대 당국에 대폭 위임 △시장가격시스템 도입(배급 제도를 폐지하고, 독립채산제를 전면적으로 실시) △환율 단일화(약 200원/1달러) △자영업의 인정 및 자유시장 개설 △철도관리시스템 일원화 △시장경제시스템 교육(인재육성) 등을 실시한다고 발표하였다. 

나진선봉지대는 북한에서 시장의 기능을 인정한 경제관리 방식이 도입된 유일한 경제특구지역으로 되었는데 여기에서 실험한 것이 2002년의 경제관리 개선조치의 토대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남한의 기업들 중에서도 나진선봉에 대한 투자에 관심을 가진 기업들이 있었다. 1998년 8월까지 통일부로부터 사업자승인을 받은 기업은 LG상사(양식업, 자전거부품), 삼성전자(전자공장, 통신센터), 대상물류(물류센터), 한국토지공사(공업단지건설), 두레마을(농장) 등이었다. 

이 중 사업승인을 받고 투자를 실행한 경우는 LG상사가 중소기업 태영수산과 함께 진행한 가리비 양식사업(승인규모: 65만 달러), 두레마을이 진행한 합영농장(승인규모: 800만 달러)이었다. 그러나 이들 사업은 1998년 9월 이후 북한당국이 남한기업인의 나진선봉 방문을 금지하면서 모두 중단되었다. 

김정일 시대 선군정치가 구체화한 시기가 1997년 이후인데, 북한 나진선봉 특구 개방정책을 실무적으로 집행했던 김정우 대외경제협력 추진위원장, 김응렬·임태덕 부위원장, 김문성 국제무역촉진위원장 등이 모두 물러났다. 1998년 초에 나진선봉 자유경제무역지대 명칭에서 ‘자유’가 삭제되어 나진선봉 경제무역지대로 개칭되었다. 1998년 9월 나진선봉에 과학기술대학 설립을 추진했던 재미교포 김진경 당시 연변과학기술대학 총장을 북한당국이 ‘간첩’ 혐의로 억류하다 풀어준 사건이 벌어지면서 남한 기업인의 나진선봉 방문도 중단되었다. 

이후 나진선봉 지대에는 중국기업의 소규모 투자가 이어질 뿐이었다. 북한은 2009년에 UNDP가 주도하는 두만강지역개발계획에서 탈퇴하고 자체의 경제특구 정책을 실시하다가 2011년에 당시의 장성택 당 행정부장이 중국정부와 ‘공동개발 공동관리’를 하는 방식으로 경제특구정책을 본격적으로 추진하는 방향으로 개편하였다

그러나 2013년에 장성택이 숙청되면서 중국과 협력을 통한 나진선봉 경제특구 개발은 다시 중단되었다. 2017년부터 강화된 대북 경제제재하에서 나진선봉지대는 중국인들의 관광 아니면 나진항이 러시아산 석탄을 중계 수송하는 정도에 멈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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