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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도시 3】 압록강 하구 신의주, 대륙침략기지에서 북중 관문도시로
【북한의 도시 3】 압록강 하구 신의주, 대륙침략기지에서 북중 관문도시로
  • 홍석근 기자
  • 승인 2023.03.29 15:1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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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록강 하구에 위치한 신의주(新義州)는 인구 약 36만 명으로 압록강변에서 가장 큰 도시다. 의주 옆에 새로 건설했다고 해서 신의주다. 

1904년 일본인 러일전쟁을 일으키면서 경의선(서울-신의주)을 만드는 과정에서 압록강 하구변의 저지대에 제방을 쌓아 시가지를 조성하고 1905년 신의주라고 명명한 것이 출발이다. 이때 중국 쪽으로는 안동(지금의 단둥)에서 봉천(지금의 심양)으로 이어지는 안봉선 군사용 협궤철도를 건설했다. 

경의선의 종착역으로 된 신의주는 일본이 철도를 통해 대륙을 지배하기 위한 거점 도시로서 커가기 시작했다. 일본은 1909년에 신의주와 중국측 안동을 연결하는 압록강 철교를 착공해 1911년 11월에 개통했다. 이로써 조선과 만주는 강을 넘어 철도로 연결됐다. 

신의주역.

1924년에는 의주군에 있던 도청이 옮겨오면서 평안북도 도청소재지가 됐다. 또 당초 제방 안쪽 면적인 6.2 ㎢에 불과했던 면적은 1941년 행정구역 대확장으로 17.7배 확장된 109.7 ㎢로 크게 늘어났다.

1945년에 8.15 광복을 맞으면서 신의주부는 신의주시로 개칭됐다. 소련군정기에 세계 최초의 반소 항쟁에 해당하는 ‘신의주 반공학생사건’ 일어나 20명 이상이 사망했다. 

한국전쟁 시기에는 북한의 다른 도시들도 마찬가지로 신의주도 미군의 폭격으로 초토화됐다. 1950년 11월 8일부터 폭격이 시작돼 11일까지 이어졌으며 하루 동안 640톤의 폭탄(소이탄 8만5천발)이 투하되기도 했다. 1952년에는 수풍댐 폭격으로 발전시설의 70%를 파괴됐고 휴전협상 중이었던 1953년 3월 17~18일에도 B-29기가 남신의주 주택지대를 폭격했다.

전쟁이 끝난 뒤에는 협동조합을 중심으로 전후 폐허 복구가 이뤄졌고 북한 내각은 1954년 6월 ‘신의주시 재건 총기본계획’을 승인하고 신의주를 압록간을 낀 국경관문도시로서 문화적인 근대도시로 만들 것을 결의했다. 일제시대에 형성된 기존 시가지를 유지하면서 신규 산업지역은 서남쪽에 조성하고, 남신의주에 화물역과 조차장을 두며 압록강에 화물 부두와 여객 부두를 신설하는 것이었다. 

1955년에 대홍수가 나서 신의주가 침수되는 어려움도 있었지만 대략 10년에 걸쳐 신의주는 전후 재건사업을 마칠 수 있었고 1964년에는 평양-신의주간에 전기철도가 운행을 시작했다. 

북한과 중국을 잇는 압록강철교(조중우의교)(사진 남북경협뉴스)
북한과 중국을 잇는 압록강철교(조중우의교)

압록강철교(조중우의교)는 복선철도를 1955년에 단선철도와 단선도로로 복구하여 9월부터 신의주와 안동(단동)을 연결하는 국제정기버스가 운행을 개시했다. 그리고 수풍발전소 복구는 1954년부터 시작되어 1958년 8월에 70만kW 발전용량을 가지는 것으로 준공됐다.

북한에 남아있던 중국인민지원군 병력이 1958년말까지 모두 철수하면서 북한은 재일동포 귀국사업(1959년 12월 시작)으로 노동력을 보충하기도 했다. 신의주는 재일동포들과 함께 중국계 화교들도 많이 거주하면서 국경관문도시 특유의 성격, 즉 국제거래를 통해 외제상품들이 거래되고 시장을 형성하며 정보가 유통되어 "바깥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좀 아는" 사람들이 많은 도시로 되어갔다. 

또한 대규모 공장이 새로 신설되면서 신의주는 경공업을 중심으로 한 공업도시로 발전했다. 현대 신의주의 대표공장이 된 대규모 공장으로는 신의주법랑철기공장, 신의주화장품공장, 신의주방직종합공장, 신의주화학섬유공장 등이 있다. 

1970년대에는 김일성과 김정일의 현지지도 교시에 의해 중앙에 의한 대대적인 개발사업이 진행됐다. 이 사업은 신의주를 국경 관문 도시, 다시 말해서 접대·선전용 도시로 건설하는 것을 목적으로, 연간 5천 세대 주택 건설, 신의주-남신의주 지하철 건설, 평양 금수산 여관에 준하는 대규모 여관 신설, 신의주공항의 민간공항 전환과 외국인 입국 초대소 설치 등의 세부계획이 수립됐다.

80년대들어 신의주는 신의주 남쪽에 지대가 높은 남신의주 지역을 주로 개발하는 도시계획을 추진했다. 농업생산지역이었던 남신의주는 신의주의 베드타운이자 신도시로서 문화후생시설과 편의시설을 갖춘 다층주택단지가 조성되기 시작했다. 

도시영역(공업지역과 생활권)과 농촌영역(농업생산지역)이 공생하는 도농복합 생활권을 실현하면서 1980년대까지 신의주는 도시계획의 성공사례로 꼽혔다.

1989년 12월에는 강안구역, 남구역, 광명구역 등 3개 구역이 설치되는 등 대대적인 개발 가능성이 점쳐지기도 했지만 개발 과정에서 신의주가 대외 선전용 도시로는 적합하지 않다는 판단이 내려져 이 개발사업은 흐지부지됐다. 1989년에 설치되었던 구역들 역시 1991년에 폐지됐다. 

신의주특별행정구의 문장

2002년에는 홍콩이나 마카오처럼 독립된 헌법을 지닌 특별행정구역을 설치하고자 하는 움직임도 있었다. 북한의 홍콩으로 개발하겠다는 야심찬 목표 하에 중국인 사업가인 39세의 양빈을 전격적으로 부총리급 행정장관에 임명하기도 했다. 하지만 다른 일로 중국 측이 양빈을 체포하여 18년형을 선고하면서 물거품이 됐다. 

2013년 경제개발구법이 제정되면서 신의주특별행정구가 공식적으로 폐지됐다. 실제로 2018년 북한 외국문출판사가 발간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주요경제지대들>이라는 홍보 책자를 보면 신의주특별행정구는 신의주국제경제지대로 대체되어 수록됐다. 다만 완전히 같은 것은 아니고 40㎢로 그 영역이 축소됐다. 인근의 황금평과 위화도는 황금평, 위화도경제지대로 따로 분리됐다.

김정은 집권 3년차인 2018년 11월, 북한은 자체적으로 신의주 특구 개발을 진행할 것임을 발표했다. 그리고 신압록강대교 인근 수출입 가공단지가 건설 중이다

현재 신의주는 북중 무역의 80%를 차지하는 관문 역할을 하는 도시로 평양 다음으로 평성과 더불어 2~3위 정도로 잘 사는 도시로 평가받는다. 청진, 사리원보다 시장화가 진전되어 있는 등 사경제가 활성화되어 있다. 

또한 혜산시, 개성시와 더불어 북한에서 한류가 많이 퍼져있는 곳으로 한국 문물이 담긴 USB, SD카드가 많이 돌아다닌다고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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