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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수·진보 정부 넘나든 남북협력사업(1) 황성옛터 ‘개성 만월대’ 공동 발굴조사
보수·진보 정부 넘나든 남북협력사업(1) 황성옛터 ‘개성 만월대’ 공동 발굴조사
  • 윤형선 기자
  • 승인 2022.01.12 18: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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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이 개성역사유적지구를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 추진하면서 시작
 2007~2018년  12년간 금속활자 포함해 유물 17,900여 점 수습

그간 남북교류협력사업은 긴박한 대내외 정세 속에 단속과 부침이 있었지만 보수와 진보의 정권 교체에도 중단 없이 이어져 온 사업이 있다. 또 국제정세에 따른 일시적 중단에도 불구하고 정부의 대북정책 변화로부터 상대적인 안정성을 보여준 사업들도 있다. 본지는 이들 사업을 소개해 남북협력사업에 있어 지속성과 안정성의 조건을 찾아보고자 한다.

만월대 구역도면.(사진-만월대 디지털기록관)
만월대 구역도면. 1~8차는 발굴조사 차수를 말한다.(사진-만월대 디지털기록관)

만월대(滿月臺)는 개성에 있는 고려의 궁궐터를 부르는 이름이다. 빈터로 남아있는 고려 궁궐의 옛 모습을 보고 후대 사람들이 ‘만월대’라고 이름을 붙여 지금까지 전해졌다. 

만월대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된 유래는 고려 궁궐의 빈터 모양이 보름달(滿月)과 비슷하여 만월대라고 불렸다는 설과 ‘달을 감상하는 대’인 ‘망월대(望月臺)’에서 변화하여 만월대가 되었다는 설이 있다.

개성은 470여 년간 통일왕조 고려의 수도로 당시에는 개경, 송도, 송경으로 불렸다. 고려 4대왕 광종은 개경을 황도로, 서경을 서도로, 이름을 바꾸어 개경의 위상을 높이고 궁궐을 중수하였다. 

개경, 즉 황도에는 왕성인 황성이 있었으나 거란 침입으로 파괴됐다가 현종 시대에 나성을 비롯해 회경전이 새롭게 건설되었다. 하지만 이 또한 1361년 홍건적의 침입으로 소실되고 말았다. 일제강점기인 1932년 이애리수가 발매한 노래 제목 ‘황성옛터’는 바로 만월대를 가리키는 말이다.

개성 만월대 남북공동 발굴조사 사업이 시작된 계기는 북측에서 개성역사유적지구의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를 추진하면서다. 2005년 11월 유네스코 등재에 도움이 되고자 남북이 공동으로 개성에서  ‘개성역사지구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위한 남북공동 학술토론회 및 유적답사’ 행사를 가진 것이 시작이다. 2006년에 여러 차례 실무협의를 거쳐 만월대 남북공동 발굴조사에 합의하였으나, 2007년 5월에 와서야 첫 발굴조사가 진행되었다.

남측 ‘남북역사학자협의회’와 북측 ‘민족화해협의회’의 합의에 따라 2007년 첫 발굴조사가 시작된 이래로 2018년 12월까지 조기철수, 중단과 재개를 반복하며 총 8차례 이루어졌다. 

발굴조사에는 남북조사원과 자문위원 등 100명이 넘는 사람들이 참가했다. 역사상 전례가 없는 공동사업이었기 때문에 양측 정부도 안심을 할 수 없었다. 언제 무슨 일이 생길지 몰랐다.

우선 의사소통부터가 쉽지 않았다. 도시락을 곽밥이라 부르고, 밤에 날이 추워지자 잠주머니(슬리핑백)가 필요하다고 했다. 그뿐만이 아니다. 귀면(도깨비)무늬를 북한학자들은 괴수무늬라고 하는 등 학술용어도 차이가 있었다. 

발굴기법도 달랐다. 북측은 구 소련에서, 남측은 영국 등 서방에서 배운 기법이었다. 조사에서 발굴, 보고서 작성에 이르기까지 모든 과정이 서로 절충하고, 그러면서 이해하는 시간의 연속이었다.

경령전 터.(사진-만월대 디지털기록관)
경령전 터.(사진-만월대 디지털기록관)
왕의 경령전 제향 모습(추정).(사진-만월대 디지털기록관)
왕의 경령전 제향 모습(추정).(사진-만월대 디지털기록관)

여러 우여곡절을 거쳐 2018년 8차 조사까지 미발굴지였던 서부건축군 33,000㎡ 중 약 59.9%에 달하는 19,770㎡를 조사했다. 서부건축군은 문헌상 내전(內殿)이 있던 곳으로 조사 이전에는 돌로 된 주춧돌과 기단 같은 것들만 드러나 있을 뿐 넓은 빈터에 풀만 무성한 상태였다.

“과연 무엇을 찾아낼 수 있을까” 하는 막막함이 있었지만 풀을 베고 나니 드디어 유구들의 모습이 나타났다. 유구는 궁궐터·집터·절터에 남아 있는 건축물의 흔적을 말한다. 유물처럼 전시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당시 사람들의 생활 모습을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2007년 시굴조사 과정에서는 특이한 유구가 발견되었는데 다른 유구들과는 달리 건물 안에 다섯 개의 작은 방이 나란히 있는 모습이었다. 기록 속에만 존재했던 ‘경령전(景靈殿)’이었다. 

경령전은 고려 궁궐 안에 있던 사당과 같은 곳이다. 경령전에는 태조 왕건과 함께 현 국왕의 아버지·할아버지·증조할아버지·고조할아버지의 초상화를 각각 다섯 개의 방에 모셨다. 경령전 유구에서 발견된 다섯 개의 방이 바로 그곳이다. 

왼쪽은 2008년 제3차 발굴에서 출토된 청자상감국화문 접시. 오른쪽은 2010년 제4차 발굴에서 출토된 일휘문 수막새.(사진-만월대 디지털기록관)
왼쪽은 2008년 제3차 발굴에서 출토된 청자상감국화문 접시. 오른쪽은 2010년 제4차 발굴에서 출토된 일휘문 수막새.(사진-만월대 디지털기록관)
2015년 제7차 발굴에서 출토된 (추정) 전일할 ‘전’, 아름다울 ‘단’명 금속활자. 크기는 사방 1cm 정도이다.
2015년 제7차 발굴에서 출토된 (추정) 전일할 ‘전’, 아름다울 ‘단’명 금속활자. 크기는 사방 1cm 정도이다.(사진-만월대 디지털기록관)

유물은 금속활자 1점을 비롯해 다양한 종류의 와전과 도자기가 약 17,900여 점 수습됐다. 구체적으로는 와전 6,374점, 자기 1,013점, 도기 125점, 금속 59점, 기타 50점 등이다. 금속 부문에는 동국통보, 해동통보 같은 화폐뿐 아니라 금속활자 1점도 포함돼 있다.

이 과정에서 2013년 만월대를 포함한 개성의 12개 문화유산이 ‘개성역사유적지구(Historic Monuments and Sites in Kaesong)’라는 이름으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어, 그 가치를 세계적으로 인정받기도 했다.

출토된 유물은 현재 북측이 관리하고 있다. 발굴 지역이 북측이었기 때문에 남측 조사단은 발굴조사 과정에서 유구와 유물을 디지털자료로 남기기 데 더욱 애를 썼고, 그 결과 2020년 ‘개성 만월대 남북공동발굴 디지털 기록관(만월대 디지털기록관)’이 개관했다. 만월대 디지털기록관에는 현재 320여 건의 유구정보와 7,600여 점의 유물정보를 서비스되고 있다.

2018년 제8차 발굴조사 이후 더 이상의 발굴조사는 중지된 상태다. 남북 역사학계와 관계자들은 제9차 남북공동 발굴조사가 성사되기만을 기대하고 있다.

<참고자료>
만월대 디지털기록관(www.manwoldae.org)
“[인터뷰] '개성만월대 디지털기록관' 추진한 김경순·심성보: 만월대 남북공동발굴 '12년' 기록, 국민께 보고합니다”, 최규환, 『오마이뉴스』 2020.12.31.
“[개성 만월대의 남북 '인디아나 존스들'] 만월대 공동발굴은 남북 역사교류의 성공 사례 최고의 성과는 서로에 대한 믿음”, 신준영, 『민족21』 2013년 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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