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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이동섭 따뜻한 한반도 사랑의 연탄나눔 상임이사
【인터뷰】이동섭 따뜻한 한반도 사랑의 연탄나눔 상임이사
  • 이재영 편집국장
  • 승인 2020.11.22 14:3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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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탄나눔은 곧 "함께 맞는 비"
연탄나눔운동 자원봉사자 5만여 명
희망래일로 유라시아 철도의 꿈 키워
남북 연탄나눔 재개되길 기다리며 '개성평화대학' 준비 중.
따뜻한 한반도 사랑의 연탄나눔 이동섭 상임이사
따뜻한 한반도 사랑의 연탄나눔 이동섭 상임이사

 

이동섭 상임이사는 가을이 오면 바빠진다. 자원봉사자들과 함께 겨울을 준비해야 하기 때문이다. 16년째 이어온 연탄나눔에는 매년 5만여 명의 자원봉사자들이 참여해 서민들의 겨울나기를 돕는다.   

‘따뜻한 한반도 사랑의 연탄나눔운동’(이하 ‘사랑의 연탄나눔’)은 연탄이 자취를 감추던 2004년 출범했다. 이동섭 상임이사는 그 해 3월 대한석탄공사 감사로 부임해서 석 달 만에 사랑의 연탄나눔을 설립했다.

‘사랑의 연탄나눔’은 출범하자마자 뜨거운 호응을 얻으며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현재까지 사랑의 연탄나눔이 후원한 연탄은 4천 4백여 만 장. 연인원 59만 여 명의 자원봉사자가 참여했다.

이처럼 자원봉사자의 참여 열기가 뜨거운 시민단체도 드물다. 연탄의 추억을 간직한 어르신부터 초등학생까지 전국으로 퍼져나간 나눔운동은 한국형 자원봉사의 이정표를 세웠다.

안정된 직위에 만족하지 않고 왜 ‘연탄나눔’을 시작했느냐는 질문에 이동섭 상임이사는 “평생 낮은 곳에서 일해 왔다”고만 대답했다. 

설립 당시는 연탄이 자취를 감출 때였다. 공기업 감사로 1인 2역을 하면서 민간단체를 설립하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 어려움은 없었나.

“석탄광산이 축소되고 있었지만 연탄은 소외된 서민들의 가정연료였다. 실제 약 20만 가구, 60만 명 이상이 연탄을 쓰고 있었다. 부임한 지 석 달 만에 변형윤 이사장님을 모시고 사단법인을 발족시켰다. 처음 발족할 때 석탄공사 노조의 도움을 크게 받았다. 당시 2,300여 임직원 전원이 1인당 연탄 100장 값 3만 원씩 8천만 원 이상을 후원해서 첫 해 나눔운동의 마중물이 되어 주었다.”

석탄공사 임직원의 기부로 큰 힘 얻어 


법인등록을 마치고 가을부터 연탄나눔을 시작하려 했지만 봉사자 모집, 지원가구 확보에 어려움을 겪었다. 결국 친분이 있던 박우섭 인천 남동구청장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2004년 9월, 정육점 앞치마를 두르고 인천에서 첫 봉사활동을 시작해서 첫 해 가구당 300장 씩 2천여 가구, 52만장의 연탄을 서민가구에 전달했다. 사랑의 연탄나눔은 북한에도 온기를 전했다. 출범 첫 해 북강원도 고성군 온정리 지역에 35만 장의 연탄을 전달했다.  

북한에 연탄을 전달하겠다는 계획을 단체 출범 초기부터 세웠나? 

“단체 이름이 꽤 길다. ‘따뜻한 한반도’와 ‘사랑의 연탄나눔’이다. 처음부터 남북을 아우르겠다는 마음으로 단체의 방향을 설계했다. 북한은 겨울이 더 길고 더 춥다. 고난의 행군 이후 북한 주민들의 연료난이 더 심각할 때였다. 첫 해 금강산 지구에 전달하고 이듬해부터 개성에서도 나눔활동을 시작했다.”

‘사랑의 연탄나눔’은 2004년부터 2010년까지 총 1천만 장의 연탄을 고성과 개성 주민들에게 전달했다.

1회 평균 5만장에서 많게는 10만장, 25톤 트럭 8대~16대 분량의 연탄을 싣고 군사분계선을 넘었다. 정주영 회장의 소떼 방북을 연상케 하는 트럭 행렬이 2010년까지 8년간 계속되었다.
첫 방북길이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출발 전날까지도 북측 통지문이 도착하지 않았지만 이동섭 상임이사는 “일단 연탄을 싣자. 막히면 돌아올 것”이라며 무조건 출발하기로 했다. 

5만 장의 연탄을 싣고 이문동 연탄공장을 출발한 트럭은 교통경찰의 안내를 받으며 퇴근길 서울을 빠져나왔다. 경찰이 안전속도로 서행하는 바람에 새벽에야 고성에 도착했다. 2004년 10월 26일, 연탄을 실은 트럭 행렬은 군사분계선을 넘어 금강산 지구에 도착했다.    

북측에 연탄을 지원한 사례는 처음이었다. 북측의 반응이 궁금하다. 

“북측 사람들은 무뚝뚝하고 말투가 독특하다. ‘일 없습네다’라고 하는데 좋은지 싫은지 감정을 알아내기 힘들었다. 당시 석탄공사 감사였던 나를 그들은 ‘감사선생’이라고 불렀다.

하루는 정색하고 북측 관계자에게 ‘성금을 모아서 가져온 연탄인데 고맙다는 말이라도 해야 하지 않느냐’고 물었다.

북측 관리의 대답이 ‘감사 선생, 고마운 걸 꼭 말로 해야 되나. 남쪽에서 온 연탄이 푸르른 금강산을 지켜냈다고 언론에 보도해도 아무 소리 않겠다.’고 하여 북측 사람의 마음을 읽었다.” 

 

이동섭 상임이사는 남북관계를 형제관계에 비유했다. 잘 사는 형이 도와주면 고맙긴 한데, 못사는 동생이 말로 표현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자존심 강한 동생은 가끔 버럭 화를 내기도 하면서... 

모든 남북협력사업, 심지어 유엔사업도 분배계획서 제출을 요구한다.  연탄은 어떻게 분배되었나?  

“사례를 들어보겠다. 한 번은 북측 관리자가 얼굴이 벌게져서는 ‘감사 동무, 연탄이 모자란다고 인민들이 항의하는 데 어찌된 일입니까’라고 항의해왔다.

알아보니 서울에서는 5만장의 연탄을 25톤 트럭 8대에 나눠 싣는데 트럭마다 싣는 수량이 달랐다. 힘이 있는 새 트럭은 많이 싣고 낡은 차는 적게 실었는데 북측에서는 마을마다 차량 당 6천 250장씩 계산해서 분배했다.

그러다보니 많이 받은 곳은 가만있고 적게 받은 곳에서 항의했던 것이다. 결국 다음부터는 차량마다 실린 연탄 수량을 알려 주겠다고 약속하고 적게 받은 곳은 나중에 보충해 주었다. 
이렇듯 인민들에게 한 장이라도 똑같이 분배해야지 차별하면 심각한 문제가 발생한다. 북측은 분배를 중요시하는 사회주의 아닌가?”

그는 군사분계선 출입국관리소(CIQ) 간부와의 일화도 들려주었다. CIQ 간부가 하루는 “감사 선생, 우리도 연탄 좀 달라”고 해서 “다음에 올 때 더 가져 올 테니 먼저 쓰시라”고 했더니 “인민에게 배분계획이 다 되어 있는 연탄을 어떻게 쓰냐”며 “다음에 올 때 5만 장에 자신들의 연탄 5백장을 더 실어 달라”고 하는 것이다. 권력기관이라도 연탄을 마음대로 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고 한다.  

5만장의 연탄을 싣고 군사분계선을 넘다

첫 해 대북협력단체 ‘나눔인터내셔널’을 통해 북측과의 접촉이 시작되었다. 이듬해에는 개성시에서는 북측 민경련과 직접 만났다. 당시 개성시 가정집 굴뚝에 연기가 오르지 않았다고 한다. 

이동섭 상임이사는 “200~300명의 북한 주민들이 장갑도 없이 맨손으로 연탄을 내리는 모습을 보았다”며 “연료난으로 목욕도, 밥짓기도 힘든 상황을 짐작할 수 있었다. 눈물겨운 상황이었지만, 그럴수록 북측 주민과 더욱 가까워져지고 싶었다”고 한다.  

사랑의 연탄나눔은 방북할 때마다 20명 안팎의 인원이 동행했다. 연탄을 하역할 때 주로 북측 주민과의 만남이 이루어졌다.  

“우리가 하역을 도와주려 해도 북측 관리들이 손도 못 대게 했다. 나는 ‘무슨 소리냐. 남쪽에서는 연탄을 부엌이나 창고까지 전달한다’고 말해 북측 주민들과 함께 연탄을 내렸다.

다음에 갈 때는 떡을 준비해 가고, 목장갑도 전달했다. 개성시위원장이 ‘차량 1대만 내리시라’고 말려도 ‘가만있으면 더 춥다’며 북측 주민이 내리는 트럭으로 다가가서 하역작업을 도왔다.

나중엔 그들도 씻는 물을 따뜻하게 데워오고, 커피도 끓여주었다. 사람관계가 따뜻해졌다.” 

그는 “연탄만 딱 전달하고 오는 것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것이 중요하다”고 여러 번 강조했다. 그래야 봉사자들도 “내가 일방적으로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 추운 겨울밤을 이겨내기를 소망하는 마음을 전달하게 된다”는 것이다.

‘사랑의 연탄나눔’은 2008년까지 금강산 지구에서 약 40만 그루의 나무를 심었다. 이 때 2,307 명의 봉사자들이 동행했다. 연탄나눔봉사자까지 합하면 약 4천 여 명의 남측 인원이 방북했다.

 

하지만 2010년 5.24 조치 이후 모든 남북관계가 중단되었다. 그 후 8년 만에 이동섭 상임이사는 다시 북녘 땅을 밟았다.

“2018년 민화협 행사 때 금강산을 다시 방문했다. 수십 번을 갔던 길도 새롭게 느껴지고 10년 전 만났던 안내원도 다시 만났다.

금강산 구선봉을 보니 벌거숭이 산등성이에 나무가 많이 자라고 있었다. 연탄나눔이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지 않았을까 생각하며 감회에 젖었다.

북측은 석탄 수출길이 막혀 몇 년 전부터 주민들에게 땔거리(석탄) 배급을 늘렸다고 한다. 금강산에서 만난 북측 사람들은 밝고 자신감에 넘쳤다.

몇 년 전 산림협력단체 ‘겨레의 숲’ 이사 자격으로 북중 국경지대에 갔을 때도 강 건너 북한 쪽 산이 푸르게 변하고 있었다.” 

남북교류 단절 이후 10년이 흐른 지금, 남북관계가 개선되면 ‘연탄나눔’은 다시 시작할 수 있을까. 향후 민생용 연탄과 석탄산업 협력 가능성에 대해 물어보았다.

 “제재가 어느 정도 풀리면 연탄나눔도 다시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북한도 빠르게 변화하고 있기에 앞으로는 1회성 사업보다는 북한이 참여하는 ‘개발협력 사업’을 준비해야 한다.

채탄·굴진, 갱내 재해 방지기술 등 남한이 앞선 분야의 협력은 제재가 풀려야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이동섭 상임이사는 “석탄산업은 한 세대 전 우리에게 절실했던 산업”이라며 “적정기술 관점에서 접근해야 한다. 사막에서는 수도꼭지보다 펌프가 필요하듯이 상대방의 입장에서 필요한 기술을 생각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희망의 철길, 평화 침목 기증운동

2010년, 이동섭 상임이사는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고 여행길에 올랐다.

그는 여행에서 돌아와 한완상 전부총리를 이사장으로 모시고 희망래일을 설립했고 이후 성유보 전 한겨레신문 편집국장에 이어 현재 이철 전 철도공사 사장을 이사장으로 모시고 ‘희망래일’을 함께하고 있다. 

“연탄나눔 북녘사업이 중단되자 마음이 답답해서 대륙열차에 몸을 실었다. 여행길에 선조들이 농사짓던 연해주, 독립운동하던 만주벌판을 생각했다.

그 땅을 열차로 달릴 수 없다고 생각하니, 우리가 섬나라보다 더 고립된 섬나라라는 걸 절감했다. 여행에서 돌아와 동해북부선부터 연결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희망래일은 “동해북부선 강릉~제진 구간 110km를 연결해서 군사분계선을 지나 11,000 km의 시베리아 대륙철도를 타고 베를린까지 가자”는 캠페인을 전개했다.

희망래일이 강원도민일보, 강원도, 동해시 등과 함께 동해북부선 철도연결 캠페인을 시작한 지 3년 만에 남쪽구간 연결 사업이 결실을 맺었다. 

지난 4월, 정부는 남북교류협력추진협의회를 열어 강릉~제진 구간 2조 8,500억원 사업에 대한 예비타당성조사를 면제했다.

희망래일은 또 정세현 전 통일부장관을 교장으로 모시고 인문학강좌 ‘대륙학교’를 개설했다. 세상을 넓게 보고, 상상력을 키울 수 있는 우리 역사속에 축적되어 온 대륙적 가치를 재발견하는 체계적인 교육의 필요성 느꼈기 때문이다. 

‘대륙학교’ 강좌에는 정세현 장관을 비롯, 김진향 박사, 전우용 교수, 황석영 작가, 김준형 국립외교원장, 이병한 박사, 지미 카터의 방북을 주선한 박한식 전 조지아대 석좌교수, 나희승 철도연구원장 등을 강사로 모셨다. 

대륙학교는 분단을 운명처럼 받아들이던 사람들에게 미래에 관한 이야기, 평화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는 박한식 석좌교수의 ‘평화론’을 소개했다.

“남자를 ‘여자가 아니다’라고 정의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평화를 전쟁이 없는 상태라고 정의하면 안된다. 평화는 이질성의 조화라고 정의하고 싶다.

이질과 이질이 만나서 대화와 이해를 통해 다름과 다양성을 인정하고 수용하는 상태가 진정한 평화라고 할 수 있다. 진정한 평화는 종교적, 정치적, 이념적 그리고 문화적 차이를 초월하는 인류공동의 신성한 가치이다. 오케스트라처럼.” 

이동섭 상임이사는 최근 박한식 교수와 함께 개성평화대학 등 남북협력의 새로운 장을  개척하기 위한 구상에 들어갔다고 밝혔다.

꽉 막힌 남북관계에 대해 그는 “오솔길도 자주 다니면 넓은 길이 된다. 정부가 다니는 고속도로 같은 길도 있지만 민간이 열어가는 오솔길도 자주 다니면 넓고 큰 길을 만들 수 있다.”고 말했다. 

봉사란 함께 맞는 비


72학번인 그는 1984년, 30대 중반의 나이에 광부가 되고자 광산촌으로 떠났다.

원혜영 전 의원 등과 풀무원 유기농식품을 일구다 노동운동으로 뛰어든 이유에 대해 그는 “군사독재 정권 아래서 편하게 사는 것이 미안했기 때문”이라고 이유를 밝혔다.  

“사북에서 광부 150명 규모의 삼척탄좌 덕대  (德大:하청업체) 영일탄광에 취업했다. 하청업체여서 노동강도가 말할 수 없이 강했다.

30도가 넘는 더위에 방진마스크도 없어 공기보다 석탄가루를 더 많이 마셨다. 안경 대신 렌즈를 착용했지만 렌즈에 탄가루가 섞여 눈을 뜨기 힘들었다. 한쪽 눈만 렌즈를 써 초점이 맞지 않은 상태에서 일하다 결국 3개월 만에 그만두었다.” 
 

이때의 광부 경험 때문에 훗날 연탄나눔에 더욱 애착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편안하게 산다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던 젊은 시절처럼, 지금도 그는 끊임없이 도전한다. 이동섭 상임이사는 스스로를 “거대한 이론보다는 몸으로 먼저 부딪쳐온 사람”이라며 지금도 자신은 변화 중이라고 했다.  

그는 최근 연변을 다녀와서 “윤동주 시인이 살던 곳, 아직도 한국말을 쓰며 살아가는 60만 조선족들과 새로운 대화를 시작하겠다”는 생각을 밝혔다. 사랑의 연탄나눔은 현재 연변 조선족 장애인 가구당 1톤의 석탄을 지원하고 집을 수리해주고 있다. 

 

우여곡절도 겪었다. 기업 후원이 줄자 ‘사랑의 연탄나눔’ 전국 지부는 독립적으로 운영하기로 했다. 이때부터 소액 기부자가 늘어나 오히려 ‘사랑의 연탄나눔’ 전국 23개 지부는 독립채산제로 운영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는 연탄나눔 초기 월급을 떼어 기부한  석탄공사 조합원, 보수와 진보를 떠나 연탄나눔 운영에 참여한 분, 소식지에 일러스트를 10여 년째 무료로 그려주는 작가, 용돈을 모아 연탄나눔에 참여하는 청소년들, 추억을 잊지 못해 발벗고 나선 어르신들이 봉사문화를 개척한 선구자들이라고 말했다. 

이동섭 상임이사는 ‘사랑의 연탄나눔’에 쏟아진 사랑을 ‘국민의 힘’이라며  에둘러 표현했다.

“2007년 12월 태안 기름유출사고 때 100만 명이 넘는 자원봉사자가 황폐해진 해변가를 닦아내고 국가적 위기를 극복해냈다. 그 때 기적이 일어나는 현장을 보았다.

그 해 사무국에 ‘우리도 단단히 준비하자’고 말했는데 정말 가을부터 전화에 불이 나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연탄나눔 자원봉사자가 늘어나고 연탄봉사가 나눔의 아이콘으로 자리 잡았다.”

인터뷰가 끝날 무렵, 이동섭 상임이사는 신영복 선생님의 글과 철학을 가장 좋아하고 실천해 나간다고 말한다. 

“신영복 선생께서 봉사란 ‘함께 맞는 비’라고 하셨다. 봉사란 내 우산을 상대에게 씌워주는 게 아니라 비가 오면 어깨동무하며 함께 비를 맞는 마음이다.”

또 신영복 선생의 ‘양심’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한 청년이 매일 구멍가게에서 연탄 한 장을 사서 언덕길을 올라간다. 연탄 살 돈이 없던 어느 날, 청년은 가게를 피해 다른 길로 올라갔다. ‘어디에서 연탄을 샀을까’라고 걱정할 지도 모르는 가게 주인의 마음을 배려했기 때문이었다.” 

연탄나눔에 참여한 봉사자들 역시 같은 마음이라고 한다. 이 청년의 마음처럼 ‘양심으로 참여한 사람들’은 봉사의 길을 바꾸지 않는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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