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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보물 강서약수 들여온 김영미 대표
북한 보물 강서약수 들여온 김영미 대표
  • 김영미 (주)바로텍 대표
  • 승인 2020.01.22 2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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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시작해도 처음처럼 정직하게”
김영미 대표.
김영미 대표.

1969년, 내 나이 열 살 때 청계피복에서 공장 생활을 시작했다. 이후 1부평 4공단 등 봉제공장 등을 전전하다 구로공단의 효성물산으로 직장을 옮겨 그곳에서 1984년 노조를 설립하고 노조위원장을 맡았다. 

그 당시 구로공단은 제조업 공장지대였다. 공장은 겉으로 보기에는 번듯했다. 주변에는 잔디밭도 있고 담장에는 싱그러운 꽃들이 피고 지고했지만, 그 안에서는 고향과 부모 형제들을 떠나 돈을 벌어 잘살아보겠다는 어린 여공들이 휴일도 없이 철야와 야근을 밥 먹듯이 했다. 

그러나 평균임금은 6만원을 넘지 못했다. 가리봉오거리의 ‘닭장 집’ 방 한 칸 월세는 3만원이었다. 월급의 절반을 월세로 내고나면 생활비가 없으니 2- 3명이 함께 방을 얻어 자취를 하며 살아야 했다. 2-3명이 누우면 꽉 차는 화장실도 없는 방에서 생활했다.

열악한 공장 환경에서 기계처럼 일하면서 온갖 인권유린을 눈물과 침묵으로 감내해야만 하는 처지였다.

열 살 때 공장에 취업, 노동운동의 길로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닭장집 신세를 면할 수 없었다. 굶주려도 돈을 모을 수 없는 현실 속에서 매일 기계처럼 일만해야 하는 우리에게는 점점 늘어나는 빚과 직업병만이 기다리고 있는 미래였다.

노동자가 스스로 부당함을 자각하고 투쟁할 수 있을 때만이 노동자가 사람답게 살 수 있고 희망적인 미래를 꿈 꿀 수 있다. 이러한 확신으로 노동조합을 결성하고 단체교섭을 하고 단체행동을 하면서 노동자가 얼마나 위대하고 당당한 사람인지 알게 되었다.

85년 효성물산노조와 함께 투쟁하며 노동자의 새 역사를 써내려가던 중 대우어페럴 노조간부 3명이 구속됐다. 민주노조 탄압의 신호탄임을 직시할 수 있었다. 이때 구로동맹파업을 하게 되었다.

구로동맹파업 위원장이 되어 파업 주도로 구속됐다. 석방된 후에는 민주노총을 건설하는 데 모든 열정을 쏟아 부었다. 1998년 국민승리21 중앙조직국장을 끝으로 나는 노동운동 현장에서 떠난다.

1989년, 노태우 정부는 북한과 남북기본합의서를 체결했다. 이때부터 북쪽과 무역, 교류가 시작된다는 이야기를 듣고 ‘언젠가는 나도 대북사업을 하겠다.’고 마음먹었다. 

한겨레신문 '남북경협 아카데미' 수강

그때 연변 8개 주에서 북한 상품을 들여온다는 소식을 듣고 처음에는 연변에 가보고 싶었다. 나중에 가게 되었지만 연변이나 훈춘의 자연조건은 강원도와 너무 비슷했다. 곧게 뻗은 금강소나무와 자작나무가 기름진 땅에 자라고 있는 그곳.

어디를 가도 강원도 들판을 걷는 기분이 들었다. 속마음으로 ‘일제강점기에 일본의 착취를 견디다 못해 고향을 떠난 사람들이 강원도의 씨앗을 가져가지 않았을까’라고 상상해 보았다. 

남북경협 초기 일부 무역상들이 연변지역 곡물을 3자 무역으로 받아들였다가 ‘북한산’이 아니라는 것이 발각되기도 했다. 정상적이든 기형적이든, 노태우 정부 때 북한산 곡물 반입이 가장 활발했다. 콩, 참깨 등 식량자급률 5퍼센트 미만인 곡물이 대량 반입되었다.

남북이 합의해서 세입절차는 밟지만, 내국 간 거래로 취급해서 면세로 북한산 물품을 들여왔다. 

이 모든 것이 노태우 정부 때 시작되었다. 1988년 남북 연락사무소 개설과 함께 북한은 단동과 중국 북경에 민경련(민족경제연합회) 대표부를 설치했다.

그때 설치된 북한 대표부가 지금껏 활동하고 있다. 남북경협이 30년 전에 비해 얼마나 퇴보했는지 사람들이 까마득하게 잊고 있고 있지만.

1990년대 초반 남북교역은 직항 무역과 3국 무역으로  2원화되어 있었다. 북한 상품을 들여오고 싶었지만 접촉방법을 몰랐고 원산지를 북한산으로 증명하는 방법도 몰랐다. 

한겨레신문의 ‘남북경협 아카데미’를 수강하면서 나 같은 일반인도 북한과 교류할 수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강의를 들으면서 통일부로부터 북한주민접촉 승인을 받아야 한다는 것과 민경련 사무실이 단동 압록강호텔 3층에 있다는 정보도 메모했다.

민경련 단동 대표부를 방문하기 위해서는 통일부로부터 접촉승인을 받기만 하면 되는 제도는 지금도 변하지 않았다.  

"북한산 곡물, 약초, 경옥고 반입으로 돈을 벌었다"

1999년 나는 인천항에서 페리호를 타고 단동까지 갔다. 그곳에서 택시를 타고 물어물어 민경련을 방문했다. 민경련 단동 대표부 책임자 이름이 전성근이라는 것은 미리 알고 있었다. 

전성근 씨는 검게 탄 얼굴에 작은 체구였지만 매우 깐깐하다는 인상을 풍겼다. 민경련은 특이하게도 나에게 이력서를 요구했다. 나는 “노동운동을 했다.

북측과 교역을 할 수 있는지 궁금했다. 곡물을 반입해서 판매하는 것에 매력을 느껴서 왔다.”는 정도만 간단하게 적어서 제출했다. 

첫 방문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북측은 나의 요구를 들어주었다. 내가 노조위원장 출신이기에 배려했을 것이라는 사람도 있다. 민주노총과 함께 판로개척을 하기로 했지만 그런 사정 때문에 나를 특별한 손님으로 대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내가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고 순수한 마음으로 대하자 그들도 나를 순수하게 대했다고 생각한다. 지금도 나는 남북경협을 준비하는 사람들에게 ‘순수한 열정으로 시작하라’고 조언한다. 같은 민족이라는 순수함을 가져야 상대방도 나를 순수하게 대해준다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

민경련 단동 대표부 사람들은 무역에 관한 한 거의 박사 수준이었다. 중국과 러시아 시장의 물가동향과 가격, 전문용어까지 훤히 꿰뚫고 있다.

그들이 국제시장 가격을 모를 것이라고 믿는다면 그것은 오산인 것이다. 내가 만난 북측 인사들은 거래 상대에 따라 터무니없는 바가지를 씌울 생각이 없는 듯했다. 그런 방식으로는 거래가 지속되지 않는다는 것을 그들이 더 잘 안다. 덤핑도, 봐주는 것도 없고 원칙대로 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순조롭게 시작한 남북교역 사업으로 나는 돈을 벌었다. 나뿐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남북교역 사업으로 돈을 많이 벌었다.

대동무역은 이렇게 북한의 곡물, 약초 반입으로 시작해서 경옥고(산청경옥)와 ‘재배산삼꿀’, 복분자 등 고급제품을 반입했다. 

남북교역 사업을 시작한 지 4년 되던 2003년, 반입액수로 200만 달러를 넘어섰다. 노태우 정부 때부터 남북교역을 시작한 사람들은 돈을 벌지 않은 경우가 없을 정도였다.

간혹 "북한 가서 모두 털리고 나왔다.”는 보도도 있는데, 나는 “남북교역 상인들이 모두 망했다면 누가 그렇게 북한과 교역에 달려들었겠느냐”고 되묻는다.  

교역을 시작할 때부터 나는 북측 제품이 “지불해야 할 만한 가치가 있다”는 증명을 남한 시장에서 분명히 한 다음 물건을 반입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리고 거의 대부분 북한 제품의 성분과 함량을 일일이 분석했다. 그렇게 분석하지 않고는 물건을 자신 있게 팔 수 없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나는 북측이 제품 함량이나 품질을 속이는 것을 보지 못했다. 경옥고는 인삼 56%를 정확하게 함유하고 있고, 토종꿀, 숙지황 등 함유물이나 성분이 정확했다. 

혹 저렴한 가격 때문에 또는 동정심으로 남북경협을 하고 싶어 하는 분들께 나는 “그런 환상은 버리라”고 말해 준다. 북한도 ‘사회보장제도’가 유지되어야 하고 제품 원가에는 원자재와 인건비가 포함된다. 따라서 북한 제품을 ‘싼 게 비지떡’이라는 생각으로 접근하면 실패한다.

오히려 북한산 제품의 가격이 훨씬 비싼 경우도 있다. 깡통에 든 북한의 정관장은 중국 제품보다 5배나 비싼데도 중국과 러시아에서 잘 팔려나가고 있다. 

'조선국보 56호' 강서약수 반입

남북교역 사업이 잘 풀리면서 나는 북측에서 소문난 ‘강서약수’를 들여오고 싶었다. 강서약수는 ‘조선국보 56호 강서약수’가 공식 명칭이다. 지하 118.5미터 흑운모 암반층을 뚫고 7세기 고구려 시절부터 솟아오른 ‘용천수’라는 말은 들었지만 물이 국보라는 것이 신기했다.

이러한 광천수는 북한과 프랑스, 이탈리아에서만 나오는 희귀한 자연 광천수라고 한다.  
북측에서 직접 관람한 ‘강서약수’ 홍보 영화에는 “어미 학이 다친 새끼 학을 데려와 강서약수로 씻기니 상처가 나아서 건강하게 날아갔다”는 전설이 소개된다.

피부병에 좋고 몸에 좋다는 ‘신비의 물’은 중국까지 소문이 퍼졌다고 한다.

강서약수 반입을 위해 북측을 설득하고 통일부의 허가를 얻는 과정이 쉽지만은 않았다. 남북경협은 오랜 기다림의 시간이 필요하다. 당장 성과가 나지 않아도, 또 제도가 달라도 서로 이해할 때까지 참고 기다릴 줄 알아야 한다. 

‘강서약수’ 반입계약은 선불로 진행되었다. 선불을 주면 나중에 떼일까 염려도 들었지만 이후 지금껏 북한과의 거래에서 나는 단 한 푼도 떼인 적이 없다.

지금은 바뀌었을지 모르지만 그때는 북측은 단 한 장짜리 계약서를 건네주었다. 간단한 거래 조건과 함께 마지막에는 ‘기타 제기되는 문제에 대해서는 호상 친선으로 해결 한다’고 적혀있는 게 전부다.

나와 그들은 수십 건의 거래를 하면서 우리가 주고받은 ‘서로 친하고 선한 마음으로 거래한다’는 단 한 줄의 문장을 서로 위배한 적이 없었다. 

1999년 ‘강서약수’ 첫 계약분을 남포항에서 컨테이너에 실어 인천항으로 들여왔다. 그런데 식품에는 ‘약수’라는 단어를 사용할 수 없어 규정상 통관이 안 된다고 했다. 미처 점검하지 못했기에 어쩔 수 없이 반송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강서약수의 남측 상품명을 ‘강서청산수’로 바꾸자고 북측에 제안했지만 그들은 국보인 ‘강서약수’ 이름을 바꿀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하지만 판매하려면 남쪽 규정을 지켜야 했다. 집요하게 설득하자 북측은 “김영미 동무, 우리가 졌소.” 하면서 내가 제안한 ‘강서청산수’ 이름을 사용해도 좋다고 허락했다. 어렵사리 반입한 ‘강서청산수’는 한 병에 3,000원씩 팔았는데 처음부터 날개 돋친 듯 팔렸다.

아무리 술이 취해도 마시고 나면 다음 날 머리가 개운해진다는 약수의 소식이 입소문을 타고 전해졌고 나 또한 매일 마시면서 그 효험을 직접 체험했다. 

우리는 강서약수 외에도 들깨, 콩, 녹두, 표고버섯, 상황버섯, 장뇌산삼, 송이버섯 등 40여 가지 북한 상품을 반입했다. 그 중에서도  ‘대동두하나’는 들쭉술을 남측 입맛에 맞게 16도 와인으로 개발한 술로, 남북이 공동으로 기획, 개발하였다. 

남측 애주가의 입맛 테스트를 거쳐 탄생한 ‘대동두하나’는 작고하신 신영복 선생께서 직접 상표를 써주셨다. 더욱이 ‘대동두하나’ 전단지 광고 모델로 북측 무용수 조명애 씨가 출연했다.

북한 사람이 남한의 상업 광고 모델로 나온 것은 해방 후 이때가 처음이었다. 북측에서는 ‘술’ 광고라며 난색을 표했지만, 남북의  ‘술문화’ 차이점을 설명해 조명애 씨를 ‘대동두하나’ 모델로 계약할 수 있었다.

제대로 홍보하지 못했지만, 조명애 씨는 2006년 삼성 애니콜 광고에 나오기 3년 전 우리 제품 전단지 광고모델이었다,

북측도 공동투자에 참여, 강서청산수 공장을 짓다  

좋은 일이 있으면 나쁜 일도 있는 법이다. 잘 팔리던 ‘강서청산수’ 병 입구가 깨지고, 병 뚜껑에 녹이 슬어 있는 제품이 발견되었다. 구매자들로부터  “입술을 다칠 뻔했다.”는 항의가 들어오기도 했다.

북한의 대표 상품을 어렵사리 들여왔는데 마치 값싼 제품처럼 취급받는 것에 내 속이 타기 시작했다. 나는 클레임이 발생할 때마다 사진을 찍어 둔 다음 방북할 때 그들에게 보여주며 따졌다.

따져야 개선되고, 북측이 수용해야 파트너 관계가 유지될 것이니까. 내가 거칠게 항의하면 그들은 당황하기도 했지만, 주장하는 내용이 맞으면  “일리 있습네다. 검사해 보겠습니다.”라며 수긍한다. 

‘강서청산수’ 불량품의 근본 문제는 북측의 전력 사정으로 일정한 전압이 공급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아예 북측에 페트병 생수 공장을 짓자고 제안했다. 

2000년대 초반, 북측도 자본과 토지를 투자하여 합작 회사 형태로 평양에서 남포 쪽으로 가는 길목에 ‘강서청산수’ 공장을 짓기로 했다. 남측에서 들여가는 공장 설비만 해도 트럭 33대 분량이 넘었다. 인천항을 통해 들여가자니 시간과 비용이 만만치 않았다.

그런데 북측은 공장 설비를 ‘판문점 CIQ’를 통해 직접 운반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북측과 거래하면서 쌓인 미운정 고운정이 있었지만 예상하지 않았던 일이었다. 

엄청난 공장설비를 화물연대와 계약하여 북측으로 반입하면서 우리는 ‘개성공단’을 오가는 다른 기업에게 지장을 주지 않기 위해 새벽 6시에 판문점 CIQ를 통과했다. 그 시각 북측에서도 합작회사 인원이 나와 우리 물건을 받아주었다.

북한에 세워진 강서청산수 공장

김포공항에 도착한 고려항공 전세기

2006년 8월 28일, 평안남도 남포에 ‘강서청산수’ 공장이 완공되어 개소식이 열렸다. 이때 전세기를 보내준 북측의 배려를 잊을 수 없다. 북측은 우리 방문단을 위해 ‘고려항공’ 전세기를 김포공항으로 보냈다.

이재형 ㈜대동두하나 대표이사와 나를 포함한 56여 명은 개소식을 마치고 30일 고려항공편으로 김포공항으로 돌아왔다. 북측이 민간기업에 전세기를 내준 것은 아마 처음이었을 것이다.  

북측의 배려는 그동안 정직하게 거래해 온 나와 우리 사업에 보내준 북측의 신뢰라고 생각한다. 사실 북측은 거래 대상(상대방)이 잘 되기를 바라지, 잘못되기를 바라는 경우가 거의 없다. 나는 금강산, 개성, 단동에서 북한의 여러 경협 담당자를 만났지만 그들이 품위를 잃은 것을 본 적이 없었다.

강서청산수 공장 설립 과정에서도 그들은 나에게 무한한 신뢰를 보냈다. 

전세기에 몸을 싣고 평양 순안공항에 내리는 순간, 남북이 합작하여 페트 용기에 담은 ‘강서약수’를 서울로 들여온다는 마음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페트병에 담은 ‘강서청산수’는 날개 돋친 듯이 팔리기 시작했다. 북한을 10년 넘게 왕래한 끝에 드디어 규모 있는 남북합작 사업을 제대로 펼쳐볼 기회가 온 것이다. 

서류로 일처리를 하던 때와는 달리, 강서약수 현지 공장을 운영할 때 나는 북측의 일하는 방식을 더욱 똑똑히 알 수 있었다. ‘강서청산수’ 공장의 규모는 1,200평 정도였고, 종업원 수는 60명가량이었다.

현장에서 나는 북측 대표와 공장 총지배인(남한의 공장장) 두 명과 만났다. 나보다 3살 어린 총지배인 여성은 인민군 출신이었다. 깐깐한 총지배인은 공장 바닥에 항상 먼지 하나 없을 정도로 철저히 관리했다.  

그는 볼 일이 있으면 기탄없이 문을 두드리고 들어와  “문제 있습네다. 현장을 보완해야 합네다.”라며 요구사항을 내밀었다.

내가 “정확하게 문제점을 말해 달라.”고 하면 총지배인은  현장 개선사항을 6하 원칙에 입각해서 정리해준다. 일처리가 확실한 총지배인과 나는 그렇게 친해졌다. 

때로는 북측과 부부싸움 하듯 싸울 때도 있었다. 
논쟁을 벌이다가 점심시간을 훌쩍 넘길 때도 많았다. 내가 “일 끝나기 전에 먹지 말자, 쟁점이 흐려지니까 빨리 이야기부터 하자,  밥이 들어가게 생겼냐.”고 우겨 밀어붙인 경우도 허다하다. 그래도 그들은 이치가 맞으면 순순히 따라주었다.  

거래가 계속되려면 서로 나쁠라야 나쁠 수 없고 속이려야 속일 수 없었다. 어느 한쪽에 귀책사유가 발생하면 반드시 책임지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관계가 유지된다.

북한을 10여 년 오가면서 또 하나 느낀 점은 그들은 쟁점 없는 대화를 절대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들은 단 한마디도 농담을 하거나 업무를 벗어난 일로 이야기꽃을 피우지 않는다.

사실 우리 민족은 기쁜 일보다 슬픈 일을 좌시하지 않고 함께 아파해주는 전통이 있다. 큰 불이 나면 우리는 "얼마나 힘들었느냐"며 위로한다. 그러나 북측 인사법은 남측과 다르다.

“피해가 많으냐. 얼마나 힘들었느냐.”고 물어보면 돌아오는 답은 "우리 민족끼리 슬기롭게 잘 해결해나가고 있습니다."이다. 그게 끝이다.

훈련이 잘 되어 있는지, 원칙인지, 아예 그런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서인지 모르지만 그들은 일상사를 하나도 궁금해 하지 않았다. 한참 후에야 그들이 잘 훈련된 사람들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니 북측과 사업하려면  6하원칙 없이 언어의 나열로 무엇을 하려들지 말아야 한다. 

북한투자 1,146개 기업 모두 문닫게 한 이명박정부  

공장이 가동되면서 남측에서 디자인, 마케팅을 준비하는 데 어느덧 2년여의 시간이 흘러갔다. 바로 그 무렵, 2008년 7월 11일 금강산에서 민간인 박왕자 씨가 북한군 총격으로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명박 정부는 이 사건을 계기로 남북관계를 닫기 시작했다. 금강산에서 포장마차 하던 사람들뿐 아니라 내륙기업도 이때부터 소리 소문 없이 파산하기 시작했다.

파산시키는 방법은 간단했다. 정부가 방북 승인을 해주지 않으면 북측 공장에 갈 수가 없기 때문이다. 

2010년 5월 24일, 이날은 내가 사업을 접은 날이 아니라 이명박 정부가 나의 날개를 접은 날이다. 그나마 명맥을 이어오던 기업을 포함, 1988년부터 남북경협을 해오던 1,146개 기업 모두가 이명박 정부의 5.24 조치로 모두 문을 닫았다.

사당동에서 북한 물품 매장을 운영하던 김기창 사장도 강직하게 사업을 해왔지만 하루아침에 가게 문을 닫았다. ‘강서청산수’ 공장도 설비투자에 들어간 투자금을 갚기도 전에 운영을 중단해야 했다.

나도 담보로 얻은 수출입은행 융자를 고스란히 빚으로 떠안았다. 30억 원을 투자한 이재형 대표는 더 큰  피해를 입었다. 이 대표는 가능성 있고 올바른 사업에 투자하고 싶어 했지만, 갑작스런 파산에 아픔을 겪고 쓰러지기까지 했다. 

노태우 정부가 열었던 사업을 노무현, 김대중 정부가 아닌 이명박 정부가 막아버린 것이다. 하늘이 깜깜했다. 1,146개 기업과 종업원, 가족이 받은 정신적 물질적 피해는 이루 말할 수 없다. 우리와 거래하던 디자인 회사, 마케팅 회사, 물류회사도 모두 거래처를 잃었다.

5.24 조치로 북한에 피해를 입혔다는 사람들도 있다. 아마 조금 피해를 입혔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일방적으로  교역을 단절한 이후 북한 제품은 중국과 소련으로 잘 팔려나갔다.

지금도 중국 베이징 거리에 가면 우리가 팔던 북한 상품이 널려있다. 그 제품을 사려면 이제는 중국을 통해 우리가 팔던 가격보다 훨씬 비싸게 사야 한다. 북측의 돈줄을 막는다고 하는 사이 중국 상인들이 떼돈을 벌고 있는 것이다. 

벼락 같은 교역중단 조치로 파산한 이후 내가 손 쓸 방법이 없었다. 북측에 두고 온 자산은 은행에서 담보나 신용평가가 될 리 없다. 살림살이를 다 처분하니 몸 하나 얹을 자리 없는 신세가 되었다. 단 1미리 미터의 희망도 없었다. 

결국 고등학교 1학년이던 아들을 데리고 절에 들어가 생활했다. 빚 떼먹지 않겠다는 마음으로 전화번호도 바꾸지 않고 오는 전화는 모두 받았다. 50대 초반 3년의 세월을 그렇게 지냈다.

절에서 3년간 매일 불상을 쳐다보았다. 부처님은 할머니가 불쌍한 손녀딸 바라보듯 해맑게 웃었다. 또 어느 날은 애인이 되기도 하고, 어느 때는 혼쭐을 내는 스승이 되기도 했다.

기도하는 법도 모르고 불상이 말을 할 리도 없건만, 하루 종일 불상을 쳐다보는 일이 유일한 위안이었다.  
 
남북경협, 우리가 집중해야 할 곳이 있다  

이제 나는 다시 일어서고 있다. 빚은 많이 갚았지만 앞으로도 최선을 다해서 마지막 남은 빚까지 갚아나가려고 한다.

나는 지금 벼 도정 기계와 누룽지 기계를 생산하는 (주)‘바로텍’이라는 회사를 운영하고 있다. 우리가 생산하는 제품은 벼를 현미 백미 오분도미로 한 번에 도정할 수 있는 기계다.

일본은 현미를 오분도나 백미로 도정할 수 있는 기술은 있지만 벼로 직접 도정하는 기계는 아직 없다. 누룽지기계도 순수 100% 우리기술이다. 언젠가는 북한 시장에도 진출할 날이 올 것으로 기대한다. 

나는 경협의 문이 열리면 다시 남북경협사업을 시작하려고 한다. 20여 년 전 남북경협을 시작할 때 만났던 민경련 단동대표부의 전성근 대표는 돌아가셨다고 들었다. 

지금 가면 북측 사람들이 내 이력을 기억할 수 있을까? 하지만 나는 옛 인연은 잊어버리고 당당하게 단동의 북한 민경련 대표부를 찾아가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것이다.

투자에 대한 보장이 제도적으로 마련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사람도 있지만 그때 가면 우리에게 올 기회가 있겠나 싶다. 

요즘 지자체나 민간에서 추진하는 소규모 남북 협력사업을 보면 과연 이런 방식이 종전 선언 이후에도 적용될 수 있을까를 생각해본다.

종전은 북한과 국제사회 간의 문제이고, 북한은 자주적으로 전쟁 리스크를 풀어나가고 있다. 평화가 정착되면 개발가능성과 성장가능성이 가장 높은 곳에 우리가 먼저 가도록 국제금융과 자본이 양보해줄까? 우리가 발 디딜 틈이 있을까?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분명해진다. 민족의 힘을 합해서 능히 지켜낼 수 있는 영역부터 지켜내는 것이다. 그것이 무엇인지 내가 단정적으로 말할 수는 없다.

다만 북한이 ‘관광국가’가 될 것은 틀림없다고 본다. 전 세계인이 가장 가고 싶은 나라, 아름다운 자연과 훌륭한 서비스를 받을 수 있는 나라가 ‘종전선언 이후’의 북한의 모습이 아닐까 상상해 본다. 


김영미 (주)바로텍 (baro114.com) 대표  
즉석 쌀 도정기계와 누룽지 기계를 제작 판매하는 회사를 운영하고 있다. 현재 (주)바로텍 제품은 중국 호주와 필리핀으로 수출되고 있으며, 국내에 가정집에서 사용할수 있는 가정용 도정기도 인기리에 판매되고 있다. ‘한뿌리죽’과 설렁탕, 한정식집 등에서 이 기계를 이용한 바로 도정 1분도 현미가 애용되고 있다. 소자본 창업자와 청년창업자의 든든한 협력회사로서의 꿈을 가지고 활동 중이다. 즉석에서 갓 도정한 쌀로 빚은 누룽지를 판매하는 일프로나온 체인점 300 곳가량에도 공급하고 있다. 무농약 무첨가 원칙을 지키고 프랜차이즈 방식이 아닌 공생 방식의 건강식품 체인을 추구하고 있다. (주)바로텍은 과자처럼 언제어디서나 먹을 수 있는 100% 현미누룽지 ‘영미칩’을 개발, 출시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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