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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남북관계 70년사, 전환기를 맞이하다
[오피니언] 남북관계 70년사, 전환기를 맞이하다
  • 하석태(코레일네트웤스 교통사업본부장)
  • 승인 2019.09.30 17:3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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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 70년사는 한마디로 불안의 70년, 전쟁과 평화와 긴장의 연속이었다.
지난 70년사 중, 이승만 정부 때 남북 분열의 씨앗을 낳았다. 군 출신인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정부는 북침통일론과 실용주의 노선을 오갔다. 김대중, 노무현, 문재인 정부는 한민족 주도의 대북정책과 통일정책을 추진하며 남북정상회담을 실현했다. 이에 반해 김영삼 정부는 보수도 진보도 아닌 철학이 빈곤한 대북정책을 펼쳤다. 박근혜, 이명박 정부는 다시 남북 관계가 원점으로 돌아간 잃어버린 9년이었다. 문재인 정부는 4차례 남북 정상의 만남을 이뤄냈지만 북미협상에 우선권을 내준 채 평화와 공존관계로의 복귀는 아직 불확실하다.

박정희, 전두환 시절의 남북대화

박정희 집권 18년간 치열한 남북 간의 공방에도 불구하고 1970년 광복 25주년을 계기로 남측은 남북대화 의사를 표명했다.

1972년 7월 4일, 박정희의 지시로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파견했다. 이후락은 평양에서 김일성과 만나 자주, 평화, 민족대단결의 3대 통일 원칙을 제정하였다.

하지만 이후 남한은 유신헌법 제정, 북한은 주체헌법 제정으로 이어져 남북대화가 오히려 ‘적대공존’의 도구로 사용되었다는 비판을 받았다. 

전두환 정권은 남북 대화의 필요성을 의식하고 최초로 북한에 정상회담을 제의했다.

1984년 9월 초 남쪽에 발생한 홍수로 전국에서 190여 명이 생명을 잃고 재산피해가 막심한 수재가 발생하자, 북한은 9월 8일 조선적십자회 이름으로 통지문을 보내 쌀 5만석(7천 200t), 천 50만m, 시멘트 10만t, 의약품 지원을 제안했다.

1985년 전두환은 북측에 남북정상회담을 제의했고, 북측 역시 같은 해 9월 허담 비밀특사를 서울에 특파해 전두환 대통령과의 정상회담 논의를 타진했다. 

 

노태우, 실용적 대북 정책과 김영삼 정부의 단절

노태우 정권은 실용주의적 노선을 걸었다. 1988년 노태우 정부는 ‘7.7 선언’을 통해 북한을 적이 아닌 ‘동반자’로 규정했다. 또한 1989년 ‘한민족공동체 통일방안’에 따라 역사상 처음으로 완전 통일 이전에 남북이 상호 공존하는, 과도기 ‘남북연합’을 설정함으로써 전면 대결이 아닌 화해협력으로의 길을 열어놓았다.

이때부터 남북경협이 시작되었고 1990년엔 본격적인 교류협력을 대비한 ‘남북교류협력에 관한 법률’과 ‘남북협력기금법’을 제정하기도 했다.

1994년 7월 25일 남북정상회담 예정을 앞두고 1994년 7월 8일 북한 김일성 주석이 돌연 사망하게 되자 조문사절단 파견 문제로 남한은 극심한 국론 분열을 겪게 된다. 

대북 정책에 있어서 김영삼 정부 철학 부재의 극치는 1994년 제네바 합의를 전후한 정부 방침에서 극적으로 드러난다. 김영삼 정부의 역할은 전무했고 북미 공동 합의문 발표와 파기의 과정은 북한과 미국에 맡겨놓았다. 

 

김대중 노무현, 연속적인 남북 정상회담과 신뢰 회복

남북한을 두 남녀로 비유한다면 김대중-김정일 정상의 첫 만남은 낭만적인 설렘이 가득했다. 2007년 10월 4일 노무현-김정일 남북정상회담공동선언은 남북한의 구체적인 평화 구현과 경제 공동체 실현 방안을 담았다. 

6.15 선언과 10.4 선언이 정권 교체 후에도 계승, 발전 되었다면 현재의 남북한 관계는 상상을 초월할 만큼 발전했을 것이다. 상호간의 경제발전은 물론 한반도의 잠재력이 극대화되고 세계사적 전환이 이루어졌으리라 본다.  

반면 이명박, 박근혜 정부는 남북대화 그 자체의 필요성에 대해 부정해버렸다. 북한 체제는 곧 무너질 것이라 믿고 북한에 대한 혐오를 확산시키면서 북한 붕괴론, 통일 대박론 등을 공언했다. 이명박 정부는 북한을 이용한 국내 민심 반전을 꾀했으나 북한은 공식적으로 대화를 거부하고 정상회담 성사를 위한 이명박 정부와의 비공식적인 대화 사실 조차 공표해 버렸다. 심지어 이명박 정부의 현금 매수 시도까지 폭로했다.

 

문재인, 4차례 남북 정상 만남과 한반도 운전자론

2018년 4월 27일과 5월 26일, 한 달 안에 판문점에서 무려 두 차례의 정상회담이 열렸다. 이어서 9.19 평양정상회담이 열렸고 5.1능라도 경기장에서는 북한 인민 15만 명 앞에서 ‘한반도 비핵화’를 선언했다. 남북 70년사에서 가장 획기적인 순간이었다. 

문재인 대통령은 트럼프 미국 대통령 방한 당시, 평택 미군사기지까지 찾아가 맞이했고, 정상회담 다음 날은 비무장지대 합동 방문에 앞서 새벽 4시에 기상해 미리 가서 맞이했다.

그 진정성이 트럼프 대통령을 감동시켰다고 본다. 한미 정상회담 이후 트럼프는 문 대통령의 대북 정책을 확고하게 지지했다. 이로 인해 남북 정상회담, 북미 정상회담을 이끌어냈다. 

세계에서 가장 까다로운 정상 두 사람을 설득하여 한반도 평화에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

북미회담 결렬의 원인은 문정인 통일안보외교특보의 지적대로 첫째 트럼프 대통령의 과욕, 둘째 김정은 위원장의 과신, 셋째 코언 청문회로 요약 할 수 있다.

북미, 남북의 평화 여정에 염려와 걱정의 안개가 걷힌 것은 올해 6월 30일 판문점에서의 북미정상회담이었다. 북미 정상 간 서신이 오가고 미국과 북한이 동시에 올해 안에 북미 정상회담이 열릴 것이라고 밝힌 것은 한반도 미래에 좋은 조짐이다.

남북관계를 이념적으로만 보는 것은 냉전시대 논리이며 앞으로 경제적 관점에서 조명해야 한다고 본다. 

 

남북경협을 통한 세계경제 중심지

대한민국은 해방 이후 원조 특수, 베트남 특수, 중동 특수, 3저 특수, 중국 특수 등을 통하여 획기적인 경제 발전이 가능했다. 이제 북한 특수가 한국경제 발전의 획기적 견인차가 되리라고 본다. 6.15선언, 10.4선언, 4.27 선언 등에서 합의한 군사긴장완화와 경제, 문화교류가 이뤄진다면 남북은 그 동안 국가 예산의 상당 부분을 차지한 군사비를 경제 중흥과 복지에 투입할 것이고 경천동지할 변화 또한 예상된다.

경의선을 통하여 멀리 프랑크푸르트, 베를린, 런던, 모스크바로 연결되는 동북아와 유라시아는 물론 세계 경제 중심지로 한반도가 탈바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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