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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남북경협을 개척한 기업가 정주영
[연재] 남북경협을 개척한 기업가 정주영
  • 이재영 기자
  • 승인 2019.09.30 17:2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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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회 고향 통천으로 가다

“고향 통천에 가면 삼촌들은 생사를 알 수 없고 사촌형제도 살아있다면 일흔을 넘겼을 텐데” 
방북 당일인 1989년 1월 22일 아침 정주영 회장은 청운동 자택에서 형제, 자녀와 며느리 등 가족과 식사를 함께 하며 고향 통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정주영 회장은 고향 친지들에게 줄 선물로 양말, 스웨터, 신발 등 옷가지와 전자계산기, 카메라, 손목시계 등 생활필수품을 꾸렸다. 소박한 선물이지만 그 양이 작지 않았다.

북한 방문이 확정되지도 않은 새해 아침엔 청운동 앞마당서 가족사진, 부부사진, 개인사진도 찍어두었다. 


남한에서는 북한의 실상도, 김일성 주석의 사진도 보도하지 않던 깜깜한 나라 북한으로 출발하는 정주영 회장의 출국장으로 기자들이 몰려들었다.

이날 김포공항을 출발, 오사카와 북경을 거쳐 1월 24일 평양공항에 도착한 정주영 회장은 북측으로부터 국빈 대접을 받았다. 평양에서 가극도 보고, 북한의 간척사업지도 둘러보았다. 또 순천 화학공장, 남포 종합기계공장 등 공업시설도 둘러보았다. 

빡빡한 9박 10일 일정 동안 정주영 회장은 ▲원산 수리조선소, 원산 철도차량공장과 합작투자회사 설립, 생산제품 러시아로 수출 ▲시베리아와 극동지역의 소금, 코크스, 천연가스 등 경제성이 있는 분야에 남북 공동 진출 등의 사업을 합의했다. 

원산-시베리아를 잇는 동해안과 극동지역 연결 사업도 합의했다. 원과 나진, 선봉, 청진을 잇는 동해안은 자연경관이 뛰어날 뿐 아니라 천혜의 항만이 있어 장차 항만 물류와 철도 연결을 염두에 둔 구상이었다. 

원산과 청진은 일제시대 중화학공업과 항만교역이 활발했던 곳이다. 종업원이 3,000여 명이 일하는 원산수리조선소는 일제 때 건립되었으나 6.25때 완전 파괴되었다가 1955년 자력으로 완전 복구했다. 원산 철도차량 공장도 종업원 4천 명, 생산능력은 연산 객차 2백 량 수준으로 역시 일제 때 건립됐으나 6.25 때 파괴돼 58년까지 네덜란드 원조로 복구했다고 한다.  

북한 공장을 견학하다 

“제가 원산에서도 여러 가지 구경을 하고 순천에서도 화학공장을 봤고, 남포에 가서 종합기계공장을 봤습니다. 대단위 여러 가지 공장을 견학했는데 그 빠른 속도로 그렇게 잘되고 있는 것은 모든 국민이 아주 긍지를 가지고 자기 직분을 잘 수행하고 있다, 그래서 좋은 성과가 난다 이렇게 느꼈습니다.” 
(북한 로동신문 인터뷰). 

황무지를 개척하면서 ‘인간의 가능성’을 극대화해온 건설가의 정신이 정 회장의 철학이자 현대의 성장 과정이었다. 북한의 인적 자원과 인프라 재건을 현대의 자본, 기술과 결합하면  단기간에 북한이 발전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한국 사람의 강인함’을 믿는 정 회장의 철학은 일본을 넘어서는 ‘극일’의 원동력이 되었다. 정 회장은 현대가 각 산업분야에서 성공하면서 “경제란 마음먹기에 따라서 빠른 시간에 도약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사실 한 나라가 크게 일어나는 데는 그렇게 오랜 시일이 걸리는 것이 아닙니다. 과거 역사에서 보면 영국이나 독일도 한 10년 안팎에 집중적으로 크게 성장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날 일본은 세계경제 초강대국이다, 이렇게 자타가 공인하고 있지만 따져보면 80년대 10년 동안 갑자기 커진 것입니다. 
(1991년 러시아 자치공화국 내 칼믹 자치국에서의 연설 중에서).  

금강산 육로관광의 단초

첫 공식 방문 때,  정주영 회장이 합의한 ‘금강산 관광 개발’은  파격적인 내용을 담고 있었다. 평양방송은 정주영 회장의 방북 성과를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정주영 동포의 고향인 금강산지구를 공동 개발하여 세계적인 관광명소로 꾸릴 데 대하여 원칙적으로 합의하고 금강산과 잇닿아있는 원산의 명사십리로부터 통천의 시중호, 동정호, 총석정, 금란지구 등 개발대상지들을 확정하였으며 그 밖에 공동개발에 필요한 자금 확보 방도와 개발을 위하여 들어오는 인원들의 내왕절차, 관광객들의 내왕방법과 개발을 위하여 현지조사단의 제2차 회의 시일 등에 대하여 의정서 형식으로 채택했습니다. (평양방송. 2019년 2월 1일 오전 10시)

정 회장은 1989년 1월24일 방북해서 2월2일 서울로 돌아올 때까지, 북한과 금강산 개발 범위, 개발자금 조달, 한국 관광객의 북한 통과 방법 등에 관한 중요한 사항들을 합의했다. 합의문 중 “한국 관광객의 휴전선을 통한 금강산 관광지구의 왕래를 허용한다”고 명시해 훗날 금강산 육로관광의 단초가 되었다. 

이는 유엔사 관할 판문점이 아닌, 우리 민족끼리 독자적으로 합의한 길로 남북을 왕래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또 정 회장은 금강산이 ‘자연과 평화’를 상징하는 세계적 관광지가 될 것으로 예견했다. 다음은 로동신문 기자와의 일문일답 내용이다.  

로동신문사 기자입니다. 정주영 선생이 이번에 고향을 방문한 기회에 금강산을 국제관광지로 개발하는 문제를 비롯해서 여러 가지 발기들을 내놓았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정 회장=금강산은 여러분이 잘 알다시피 온 세계에 자랑할 만한 명산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금강산을 좀 개발해 가지고 평화와 자연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자랑스럽게 보여주고 싶은 그런 꿈을 항상 가지고 있었습니다.(중략)

금강산은 우리가 개발해서 평화와 자연을 사랑하는 사람들과 온 세계 사람들에게 자랑하는 동시에 이 나라를 다스리는 사람들이 자연과 평화를 사랑하게 되면 온 세계에 알려지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평화와 모든 통일과 관련되는 일입니다. 공화국정부도 “남쪽에 살든, 북쪽에 살든 한민족인데 그것은 제일 먼저 보여주어야지 배제할 수가 없다”고 말한 데서 감명을 받았습니다.

‘자원개발’ 투자 꺼린 정주영 회장  

합의문에는 “소련 시베리아 등 극동지역 공동 진출, 소금, 코크스, 천연가스 등 경제성이 있는 분야에 함께 진출”한다는 합의사항도 있었다. 자원개발에 관한 내용이다. 정주영 회장은 북한 노동력을 투입하는 스베틀라야 산림개발에는 관심을 두었지만 북한의 자원개발 사업은 비중을 두지 않았다. 

정주영 회장은 1984년 마리브 유전에 투자했다. 그것도 미국 헌트사 컨소시엄에 유공, 삼환개발, 유개공과 함께 10% 지분만 투자했다. 마리브 유전은 대 성공을 거두었다. 

당시 주강수 부사장은 석유개발공사 김서운 박사와 보고서를 만들어 정주영 회장에게 마리브 유전 투자계획을 올리자 정 회장은 “석유가 나올 것인지, 얼마나 가능성이 있는지 대답해 봐”라고 되물었다고 한다. 10%라고 보고하자 “주 이사 돈이라면 투자하겠어? 자기 돈으로도 못 할 사업을 왜 회사 돈으로 사업을 하라고 하느냐”며 거절했다고 한다. 

주강수 부사장(당시 이사)이 “제 돈이면 못하지만 회사경영이라면 투자합니다”라며 용기를 내어 설득하자 정 회장이 즉석에서 사인해서 투자가 결정되었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이었다.

마리브 유전 사업 이후 정주영 회장은 자원개발사업에 투자하지 않았다. 정주영 회장을 잘 아는 현대맨들은 정 회장이 ‘자원개발은 도박’이라는 생각에 함부로 투자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안다.   

고향 통천에서의 이틀 밤

북한 방문의 마지막 일정으로 정 회장은 고향 통천으로 향했다. 북측이 제공한 헬기를 타고 통천으로 향한 정주영 회장은, 하늘에서 내려본 겨울 금강산의 독특한 풍경에 감회에 젖고 그야말로 수십 년 만에 떠나 온 고향 통천 땅에서 친지를 만난다.  

당시 기고 형식으로 실린 정주영 회장의 방북기 일부를 그대로 싣는다. 

“아버지 환갑 때 마지막 보고 44년 만에 부둥켜안은 혈육친지들, 숙모와 사촌동생 모두 늙었고 나도 늙었다…. 쪼글쪼글해진 얼굴을 맞부비니 숙모도 울고 형도 울고 나도 울음을 참을 수 없었다. 하루저녁에는 친척들이 북엇국을 끓여놓고 소주를 주거니 받거니 하며 살아가는 이야기를 실컷 나눴다. 남쪽의 식구를 하나하나 보여주며 이름과 하는 일을 소개했다.

여섯째 숙모의 사촌 하나는 트럭운전사로 일하고 있다 했고 또 하나는 농사를 짓고 있었다.

스웨터, 신발, 스타킹 같은 선물도 나누어 주었다.

이렇게 만나니 40도나 되는 소주가 달기만 했다. 동해안 물 냄새가 나는 듯 북엇국은 옛맛 그대로였다. 밤이 이슥해 생시에 아버지(鄭捧植)가 기거하시던 안방에 누워 잠을 청했으나 쉬 잠은 오지 않고 만감이 교차했다.” (동아일보 1989. 2.4)

1945년 9월 아버지 환갑잔치를 차리기 위해 고향을 다시 찾았다가 한탄강을 건너 떠나온 것이 마지막이었다. 정주영 회장은 “이제 뚫리기 시작한 오고가는 길이 확 열리기를 빌고 또 빌면서 이별의 아쉬움을 가누었다.”고 회고했다.

정주영 회장은 고향을 떠나기 전, 허리까지 차는 눈길을 걸어 마을에서 3km 떨어진 할아버지 할머니 산소에 엎드려 큰 절을 했다.

하지만 정주영 회장은 귀국길에 김포공항에서 체포당할 위기에 처한다. 정주영 회장이 체결한 합의문을 안기부는 ‘무효’라고 규정했다. 북한에서 기자회견한 내용을 두고 ‘국가보안법’을 적용하려는 시도도 있었다.

2차 방북 때 사업내용을 비밀리에 추진하기로 했지만 일본 언론이 이를 폭로해 북한의 반발을 불러왔다. 노태우 정부의 북방정책도 미국의 압력으로 흔들리기 시작했다. 

고향 방문 마지막 날, 정 회장은 숙모에게 와이셔츠 한 벌을 주면서 “깨끗하게 빨아서 두세요. 다음에 와서 입을 테니까”라고 했다고 한다. 이후 10년을 지나 그 와이셔츠를 다시 입었는지는 모른다.

10년 뒤 서산 농장의 소떼를 몰고 재방북하기까지, 정주영 회장은 북한 땅을 밟지 못했다. 금강산 관광 개발 계획은 여기서 멈추고 다시 10년을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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