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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준영의 ‘북한 비지니스 에티켓’ 【3】북한사람들이 가장 잘하는 외국어는?
신준영의 ‘북한 비지니스 에티켓’ 【3】북한사람들이 가장 잘하는 외국어는?
  • 신준영 남북역사학자협의회 사무국장
  • 승인 2019.09.30 1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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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준영의 ‘북한 비지니스 에티켓’ #3

필자는 기업인들을 존경한다. 전 재산을 걸고 승부하여 순식간에 엄청난 돈을 버는 능력도 놀랍고 어느 순간 전 재산을 잃기도 하는 결단력 또한 존경스럽다. 
필자는 취재 기자로, 또 남북사회문화 교류협력 사업자로 20여년째 남북을 오가며 얻은 정보와 경험을 북한 비즈니스에 나서는 기업인들이 갖춰야할 ‘에티켓’으로 정리해 보려 한다. 

존경하는 기업인들의 결단력으로 남북경제가 함께 도약하는 그날을 염원하며. 

북한 사람들이 가장 잘하는 외국어는 무엇일까? 흔히들 중국어나 러시아어라 생각하기 쉽다. 그런데 아니다.

정답은 완전 뜻밖에도 ‘불어’란다.

“북한이 프랑스하고 뭔 상관?”이라고 반문할 수 있는데, 이는 북한의 대외교류사와 깊은 관계가 있다.  

흔히 북한을 폐쇄사회라고 하는데 필자는 이에 대해 한 북측 인사로부터 항변을 들은 적이 있다.

“동서 냉전이 계속되던 80년대까지도 70여 개국과 교류했는데 우리가 왜 폐쇄사회냐?”

냉전 시기, 서방에서는 소련은 ‘철의 장막’, 중국은 ‘죽의 장막’이라고 표현했다. 이는 물론 서방 입장에서의 명명이었다.

냉전 시기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양대 진영이 지구상에 팽팽하게 대치하고 있었고 사회주의 국가들은 진영 내에서는 물론 제3세계 비동맹국가들과도 활발하게 교류하고 있었다.  

북한 역시 사회주의국가, 제3세계 비동맹 국가 등 70여 개국과 외교관계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중·소나 동구권에는 외교관·유학생 들이 주로 나갔다면, 아프리카 제3세계 국가들에는 이외에 사회·문화 각 분야의 사절단들도 다수 파견되었던 듯하다. 

이는 북한 특유의 제3세계 비동맹외교의 일환이었다. 필자는 방북 취재 중 북한 교사들이 아프리카에 나가서 흑인학생에게 집단체조를 가르친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이쪽 줄 세워놓고 저쪽에 가면 이쪽 줄이 무너지고, 다시 와서 세워놓으면 또 저쪽 줄이 무너지고... ” 

현지인에게 전혀 익숙치 않은 집단체조라는 게임을 가르쳐서 공연하느라 몇 년을 진땀을 뺐다는 얘기였다. 실제로 당시 에티오피아 등에서는 북한 교사들이 온갖 역경을 딛고 지도한 매스게임이 성황리에 공연되기도 했었다. 

또한 아프리카 각국에 파견된 북한 예술가들이 세운 거대한 조형예술물들은 현재 아프리카 거의 전역에 존재한다. 최근 이 사업이 북한의 주요 외화벌이 수단 중 하나로 지목되어 조형예술물들을 세운 북한의 ‘만수대창작사’가 유엔제재 대상에 포함되었을 정도다.

이처럼 북한 사절단들이 대거 활약한 아프리카에서 사용되는 언어가 바로 불어였다. 프랑스 식민지에서 독립한 나라들이 많기 때문이다. 

북한은 분단 이후 자기 나름의 대외 교류를 통해 문화와 문명을 형성해왔다. 남한은 미국·일본의 영향이 압도적인데 비해 북한은 그간 교류했던 여러 나라들에서 영향 받은 문화적 흔적들이 중첩되어있는 게 우리와 다른 점이다. 

그러다 보니 구소련·러시아에 유학했던 사람들은 북한이 소련과 똑같다고 하고, 중국 유학생들은 중국과 같다고 한다. 일본 전공자들은 일본의 영향이 크다고 한다. 개성공단 북측 근로자들을 보면 당연히 우리와 닮은 점들이 많이 보인다.

이 같은 북한의 ‘문화 유적층’들을 하나씩 살펴보자. 우선 외부인의 눈으로 보기에 북한이 소련과 동구권에서 영향 받은 대표적인 분야는 바로 건축물이다.  

김정은 체제 이후 평양은 대규모 건설공사로 매우 화려해졌는데 이전까지 평양의 첫 인상은 넓은 녹지 속에 무채색의 저층 건축물들이 늘어선 북유럽 도시 같은 느낌이었다.

6.25전쟁으로 완전히 파괴된 평양을 재건하는 과정에서 큰 도움을 준 것이 바로 소련과 동구권의 건축가들이었다. 평양을 비롯해 북한 전역에서 흔히 눈에 띄는 5층짜리 아파트는 대표적인 소련식 건축물이다. 아파트라는 건축물 자체가 인민들의 ‘평등한 주거’를 추구했던 사회주의 소련의 작품이었다. 

그런데 북한은 평양 재건 과정에서 소련이나 동구에도 없는 특유의 건축기술과 조형예술 실력을 축적하여 대담하고 역동적인 기념비적 건축물들을 평양에 조성하고 이를 아프리카 각국에 수출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이에 비해 중국의 영향은 음식문화와 언어생활에서 손쉽게 찾아볼 수 있다. 북한의 식당에서 코스로 식사를 하게 되면 찬요리가 차례로 나오고 이어서 더운 요리가 나온다. 

이것은 중국식이다. 조선음식집인데도 회전식 원탁에 요리를 올려놓고 원탁을 돌려가며 각자 음식을 덜어서 먹는 중국식 시스템을 갖춘 식당도 많다. 식당에 걸어놓은 미인도 속의 여인들은 눈썹을 초승달같이 가늘고 둥글게 그렸는데 이 역시 중국식이다. 

북측이 자주 쓰는 용어들 중 우리는 쓰지 않는 단어들이 있다. 서명을 ‘수표’라 하고, 이해를 ‘료해’라고 한다. 관광이란 단어는 없고 ‘참관’이 그에 가장 가깝다. 처음에는 갸우뚱했는데 알고 보니 중국어에서 온 단어들이었다. 

전통 중국어가 아니라 사회주의 신중국에서 만들어진 단어들인 듯하다. ‘관광’이 아니라 ‘참관’인 이유는 자본주의 문화에서의 개인 관광이 사회주의 사회에 존재하지 않고 인민들의 교양과 학습을 강조하는 사회운영원리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서명’이나 ‘관광’이란 말은 조선시대까지는 없던 단어인데 남측은 이 단어들을 어떻게 만들었을까? 우리가 만든 것은 아니고 서구문명을 먼저 접한 근대 일본이 만든 조어를 도입한 것이다.  

물론 북에도 일본문화의 영향이 있다. 고깃집에서는 식사 전에 생맥주부터 한잔하는데 이는 일본식이다. 식당에서 맥주와 술은 다르다. 술은 30-40도를 넘나들어야 술이다. 식당 벽에 여러 가지 메뉴들을 써 붙였는데 내용은 한글이되 글자모양은 일본 특유의 동글동글한 유아적 서체이다. 

중·소의 영향이야 사회주의 진영 내 교류의 당연한 결과라 하겠지만 일제 잔재 청산을 충실히 했다는 북에서 일본의 영향은 어떻게 된 것일까? 70년대 전후 일본 정계에서 사회당의 세력이 강할 때 북일 간의 교류가 활발했고, 재일조선인총련합회(이하 총련)계 재일동포들의 ‘조국 투자’도 상당한 영향을 미쳤던 것으로 보인다. 

평양 거리에는 막대한 재산을 들여 아파트 단지를 지어 헌납한 총련계 재일동포를 기리는 의미에서 그 사람의 이름을 붙인 거리도 있고, 총련계 재일동포들이 투자한 호텔, 식당, 백화점, 볼링장 등 여러 시설을 자주 볼 수 있다. 

평양 시내에는 핸들이 오른쪽에 있는 일본 자동차를 그대로 운전해서 다니는 모습도 종종 볼 수 있는데 이런 과정에서 유입된 일본의 기술과 문화들이 북한의 문화층에 차곡차곡 퇴적되었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러면 북한에 서구문명의 영향은 없을까? 꼭 그렇지는 않은 것이 평양이나 개성의 서점에 들러보면 세계문학전집 시리즈들을 손쉽게 발견할 수 있다.

낱권 판매를 해서인지 전집 전체가 꽂혀 있지는 않았는데 필자는 『삼총사』, 『장발장』, 『테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등의 책을 본 적이 있다.

그 중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북한사람들은 어떻게 읽었을까 궁금해서  들쳐보니 책 말미에 붙은 서평에서 “스칼렛 오하라는 리기주의자”라고 평해놓았다.   

그렇다면 2000년 6.15공동선언 이후 근 20년간 가다 서다를 반복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끈질기게 계속되어온 남북교류를 통한 남한의 영향은 어느 정도일까? 아무래도 요즘 북한사회에서 대 인기라는 남한의 드라마나 영화 등이 미친 영향이 가장 크지 않을까 싶다. 

탈북자들에 따르면 남쪽 영화를 보는 것이 원칙적으로 금지되어있지만 북한체제를 비판하거나 폭력적 선정적인 내용이 아니면 크게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고 한다. 

그렇다고 해서 북한 비즈니스 파트너에게 우리 드라마 얘기를 화제로 꺼내는 것은 넌센스일 것이다. 우리 사회도 그렇듯이 한창 바쁜 북한의 비즈니스맨들 중 집에서 금지된 남한 드라마를 보고 있을 사람이 있겠는가.  

남북교류 초기에는 북한의 대남일꾼들이 남한사회를 학습하기 위해 남한 드라마나 영화를 이 보고 토론하는 프로그램이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현 시점에서는 북에서도 굳이 영화나 드라마가 아니라 지난 20여 년에 걸친 남북교류사를 살아있는 교재로 하고 있을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북한 사회는 분단 이후 70여 년간 당시의 국제 환경 속에서 가능한 국제교류들을 꾸준히 진행해왔다. 그들을 폐쇄사회에서 살아온 국제 문맹처럼 대한다면 큰코다칠 수 있다는 것이다.  

특히 우리가 미·일 중심의 세계에서 세계화되었다고 한다면 그들은 다른 세계와의 교류 속에서 감각을 익혀왔다는 점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사람들과 처음 만났을 때 미국 사람들은 주로 악수를 하지만 일본 사람들은 정중하게 절을 한다. 

그런데 어떻게 된 건지 우리나라 사람들은 악수를 하면서 절을 한다. 북한 사람들은 악수를 하면서 절을 하지 않는데 이걸 무례하다고 하는 사람도 있다. 그런데 북한 사람들이 무례한 것이 아니고 우리가 새로운 ‘에티켓’을 창조한 것이다.

그런데 요즘 어떤 북한 사람들은 남쪽과 만날 때 악수를 하면서 절을 하기도 한다. 문명은 전파되는 것이다! 

이제 다시 북한의 최고 외국어로 돌아가 보자. 과거의 최고 외국어가 불어였다면 현재는 무엇일까? 영어일까? 

냉전 시기 북한에서는 러시아어를 제1외국어로 가르쳤다고 한다. 평양외국어학원 등 국가가 필요로 하는 외국어 인재들을 키우는 교육기관에서 영어를 공부하는 학생들은 영국 BBC방송을 들으면서 공부했다고 한다.

그래서 현재 대미 외교전의 최전선에 선 북한 최선희 부상의 영어는 정확하고 전문적이지만 발음은 강한 영국식이다. 

2000년대 초 필자가 방북취재에 나설 무렵 북미관계 수립을 위한 북한 당국의 의지가 작용한 탓인지 이미 북한에는 영어 바람이 불고 있었다. 일반 학교에서도 영어가 정식 교과로 되었다. 당시 만난 한 북한의 고위관료는 “내가 학생 때는 러시아어를 배워줘서, 나는 영어는 까막눈이야” 하면서 한탄했을 정도였다. 

평양외국어학원은 우리로 치면 대원외국어고등학교 급의 학교인데, 교과는 중고과정이 합쳐져 있다. 외고가 입시 명문기관화되어 있는 우리와는 달리 실제로 외국어 영재를 키워서 평양외국어대학에 진학시켜 외교관을 길러내고 있다.

북한에서도 자식이 여기에 합격하면 엄청난 자랑거리다. 필자의 사업 파트너의 자녀가 평양외국어학원에 붙었다는 소식을 듣고 축하 인사를 했더니 평소 성품과 달리 사양하지 않고 자랑할 정도였다. 

 “무슨 과인가요?”
 “영어과입니다.”

이 대목에서는 목에 힘이 더 들어가고 자부심이 얼굴에 가득했다. 영어과가 제일 경쟁이 치열한 모양이었다. 

“요즘도 BBC방송 들으면서 공부합니까?” 
“아닙니다. 이제는 미국 영어를 해야죠.” 

앞으로 우리 기업인들은 사업 현장에서 유창한 미국식 영어를 구사하는 북한 젊은이들을 만나게 될 것 같다.  

 

오늘의 교훈
- 북한 사람들이 가장 잘 하는 외국어는?
- 80년대까지는 불어, 90년대부터는 영어. 
  현재는 단연 미국 영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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