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산 마늘 지킨 마늘 대통령 김용관
국산 마늘 지킨 마늘 대통령 김용관
  • 이기영 기자
  • 승인 2019.09.30 15:5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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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10월 13일, 개성공단 근처 개성시 성남동에 마늘 가공공장이 건립되었다. 이 공장은 남북한 통틀어 가장 규모가 큰 손 마늘 가공공장이다. 제주도 마늘을 껍질 채 가져가 손으로 탈피하여 다시 남한으로 들여오는 작업을 하는 곳이었다. 

이 공장에서 2,500여 명의 북한 근로자들이 주6회 1일 평균 40톤의 깐마늘을 작업해 남측으로 들여왔다.  

마늘 유통업에 종사하다 북측과 마늘협력을 시작한 김용관 대표는 개성공단을 제외한 모든 남북교역을 중단시킨 2010년 이명박 정부의 5.24조치로 사업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마늘 가공공장 운영으로 북측의 의약품 보급과 남측의 마늘가격 안정, 중국산 마늘 퇴치에 크게 기여했다. 남북한 마늘교역을 주도했던 전 (유)산과들농수산 김용관 대표를 만나 재기의 꿈과 농산물 남북협력의 미래를 전망해본다.


 

무작정 시작한 마늘 남북경협 

“제가 북한과 사업을 시작할 때 쯤 중국산 깐마늘에 들어와 마늘값이 폭락할 조짐이 보였습니다. 통마늘을 북한에 보내 북한에서 깐마늘로 가져오면 괜찮겠다 싶어 무작정 시작했습니다. 이후 마늘가격이 안정되었지요. 지금은 다시 마늘값이 폭락하고 있습니다. 마늘뿐 아니라 농민들이 애써 재배한 작물을 추수하지 못하고 갈아엎는다는 뉴스를 보면 지금도 마음이 아프지요.”

김용관 씨가 사는 곳은 (유)산과들농수산 건물이 있던 인천시 남동구 한적한 외곽지역이다. 넓은 공터에 트럭 한 대가 서 있고, 중국집 건물이 보였다. 건물과 공터, 텃밭이 모두 한때 김용관 대표의 ‘산과들 농수산’ 소유였다. 얼마 전 땅과 건물 소유권을 모두 채권자에게 넘겼다. 채권자에게 “이곳에서 3년만 살겠다.”고 부탁했다고 한다. 지금은 낮에는 트럭을 몰고 아침저녁으로 앞마당 텃밭을 가꾼다. 

 

“중국집이 옛날 사무실입니다. 본사가 제주도였고 여기가 지사로 쓰던 곳이죠. 개성공단에서 돌아온 트레일러가 앞마당을 한 바퀴 돌아 사무실 앞에 섰습니다. 저는 지금 저 옆 컨테이너에서 살고 있습니다.”

숙소 옆에는 분재와 채소, 과실수가 자라고 있었다. 뒷마당엔 토종닭을 풀어놓고 친환경농법으로 키우는 텃밭도 있다. 집 주변은 작은 정원처럼 잘 가꿔져 있다. 

찾아간 날은 마침 김 대표 생일이어서 케이크를 자르며 대화를 이어갔다. 

김용관 대표는 2005년부터 남북경협에 뛰어들었다. 처음엔 개인 돈을 마련하여 단동에 있는 북한 민경련을 찾아갔다. 그때는 북한을 한 번 방문하려면 집 한 채 값이 소요됐다. 그래도 ‘북한과 마늘 사업을 해야겠다.’는 마음이 앞섰다.  

“북한에서 마늘을 손질해서 깐마늘로 가져오겠다고 생각했죠. 주변에서 미쳤다고 그래요. 정신 나간 사람 아니냐고. 망할 짓을 한다는 거죠. 하지만 마늘은 제가 가장 잘 아는 품목입니다. 중국산 깐마늘이 수입돼 우리 마늘농가가 모두 어려워질 때였죠. 유통업에 몸담았던 저는 북한에서 깐마늘을 가져오면 승산이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중국산 깐마늘과의 싸움  

2005년 김용관 대표가 마늘 사업으로 북한에 진출할 무렵엔 중국 깐마늘이 우리 시장을 잠식하고 있었다. 가정주부들이 통마늘을 필요한 만큼 사뒀다가 조리할 때 까서 사용했는데, 중국산 깐마늘이 시장에 풀리면서 시장을 잠식해갔다. 중국산 깐마늘이 값싸고 편하겠지만, 차츰 가격도 오르고 국산 마늘 가격은 폭락하기 시작했다. 

“국산 마늘은 기계로 깐 마늘이 유통되었습니다. 하지만 기계로 까면 유통기한이 짧고 마늘의 영양성분은 사라집니다.”

마늘 껍질을 기계로 벗기는 과정에서 열을 가하고 껍질을 바람에 날린다. 껍질 밑에 함유된 알리신은 휘발성이 강해 파괴된다. 마늘이나 감자는 조그만 흠집이 생겨도 금세 부패한다. 보통 기계로 깐 마늘이 1주일, 손으로 까면 20일, 북한산은 최대 3개월까지 신선도가 유지된다. 중국 깐마늘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북한에서 가공한 손 마늘 물량이 많아야 했다.  

“처음부터 목표를 높게 잡았습니다. 북측 파트너들에게 마늘 작업을 위해 큰 작업장이 필요하다고 했지요. 북측에서는 ‘남포’ 쪽을 제안했습니다. 저는 남포 쪽은 힘들다고 거절했습니다. 깐마늘을 최대한 신선한 상태로 남쪽으로 가져오려면 운송 거리가 짧아야 했기 때문이죠.”

마늘은 운송기간이 짧을수록 신선도가 유지된다. 개성에서 판문점을 통과하면 시간을 절약할 수 있다. 이런 과정을 거치며 김 대표는 200년 2월 26일 북한 측 파트너‘ 정성의학 종합센터 건강식품 개성분공장’과 마늘 위탁가공사업 합의서를 체결했다. 

계약 절차와 접촉 과정은 정성제약 의약품공장 지원사업을 하던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본부가 다리를 놓아 주었다. 정성제약은 마늘 사업을 관리감독하기로 하고, 김용관 대표는 가공한 마늘을 국내로 들여와 유통하는 구조였다.  

2006년 4월 ‘산과들 농수산’은 정성제약과 본계약을 체결하고 5월엔 개성시 성남동에 공장부지를 확보, 기계와 설비를 북측으로 보냈다. 이후 2010년까지 산과들농수산은 5,000평 부지에 약 1,000평 규모 개성 손 마늘 공장에서 2,500명의 일손이 작업한 마늘을 판문점을 통해 하루 20톤씩 들여왔다.

 

마늘재배 농민이 붙여준 이름 마늘대통령  

“남쪽에서 제주도 마늘을 가져갔습니다. 제주 마늘은 껍질이 두껍고 바닷바람을 많이 쐐서 거칠지만 품질은 중국산보다 훨씬 좋습니다. 이 마늘을 북측으로 가져가서 작업해서 깐마늘로 반입해 오는 사업이었습니다.”

겉으로 보기엔 간단한 사업이었다. 하지만 김 대표는 이후 북한 손 마늘 공장에서 가져온 마늘이 우리나라 전체 마늘유통량의 10%를 점하게 된다. 

“개성에서 하루 35톤이 들어왔습니다. 신선한 마늘 전량이 일주일 만에 전국으로 유통되었지요. 식자재 유통상인들은 선금을 줄 테니 마늘을 달라고 할 정도로 최상품이었습니다. 우리나라 마늘 소비량이 하루 300톤에 이릅니다. 그 10분의 1을 제주 깐마늘이 차지했습니다. 시장지배력이 생겼습니다.”

김 대표가 제주산 마늘을 북한에서 가공해서 들여오면서 시장 판도가 바뀌기 시작했다. 중국산 깐마늘이 밀려난 것이다. 제주 마늘농가의 수매가도 안정적으로 유지되었다. 덕분에 전국 마늘 수매가도 오르기 시작했다. ‘마늘대통령’이라는 이름은 이때 붙여졌다. 

“유통업자는 조금만 남아도 됩니다. 물량이 많으니까 1~2 %만 남아도 큰돈입니다. 하지만 농민들은 20% 이상 이윤이 남아야 농사를 이어갈 수 있습니다. 제주 농민들도 마늘 사업을 환영했습니다.”

북한에서 가공하면 어떤 이점이 있느냐는 질문에 김 대표는 “북한 근로자는 손길이 섬세하고 근면하고 부지런하다”고 답한다. 마늘 한 쪽도 정성스레 다루면서도 일손이 빠르다는 것이다. 초기에는 북한 근로자들 작업에 관여했지만 사업이 안정되면서 월 1회 공장을 방문했다. 이때 반입된 마늘을 검수하다 보면 한 톨 한 톨 정성이 느껴졌다고 한다. 마치 어머니의 솜씨를 보는 것처럼, 버려도 될 작은 쪽마늘까지도 모두 버리지 않고 손질하고 흠집이 거의 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북한에서 가공하면서 수익이 난 이유는 바로 ‘작업 숙련도’가 높았기 때문입니다. 중국보다 20% 정도 더 생산성이 높습니다. 마늘은 조금만 흠집이 나도 금세 부패합니다. 하지만 북한에서 들여온 것은 버리는 것이 거의 없었어요. 제가 돈을 번 것이 아니라 마늘을 손질해준 북한 근로자들이 돈을 벌게 해 준 것이지요.”

 

유통업자들의 반격, 두려운 사람들 

하지만 좋은 일만 있지는 않았다. 중국산 깐마늘을 수입하던 업자들의 반격이 시작되었다. 

“김용관이 중국 저온창고에  마늘을 보관했다가 북한으로 보내 들여온다. 제주 마늘을 중국으로 밀수하고, 이곳에서 올라가는 컨테이너에 쓰레기를 실어 개성으로 보낸다.”는 모함이 나돌았다. 투서가 국회로, 청와대로 들어갔다. 이 일로 감사를 받았지만 모함이라는 사실이 드러나 오히려 마늘 홍보가 되었다.  

진짜 위협을 느낀 것은 동종 유통업체의 협박이었다. 생명을 위협하는 협박문자가 쏟아졌다. 
당시 본사는 제주도에 있었고, 지사는 지금의 인천 남동구에  있었다. 밤길에 한적한 남동구 물류창고로 들어올 때면 등골이 오싹했다. 위험하다는 생각에 급기야 경찰로부터 ‘신변보호요청’을 하기도 했다. 중국산 수입업자, 유통업자들의 반격이 있었기 때문이다. 가격담합도 김 대표를 위협했다. 

“경쟁 업체에서 ‘김용관이 얼마나 버티나 보자. 손해를 보더라도 마늘 가격을 낮춰 1년 내 김용관은 망하게 하겠다.’는 소문이 돌았습니다. 다행히 이 소식을 전해주는 분들이 있었지요. 이대로 가면 큰 적자 속에서 서로 죽기살기로 경쟁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저는 북측에 가격이 내려가니, 3개월 만 출하를 중지하고 대신 최소한의 유지비용만 부담하게 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어려운 요청이었지만 정성제약 측이 들어주었다. 3개월 정도 지나자, 덤핑 판매를 하던 경쟁업체들이 손해를 견디지 못했고, 그들 사이에서 자중지란이 일어났다. 

2009년 경 (주)산과들농수산의 지분율이 낮았던 김용관 대표는 독자적으로  유한회사 산과들농수산을 설립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또 한 번 힘든 고비를 넘긴다. 지분을 둘러싸고 내분이 생겨 마음고생이 심했다. 유한회사를 설립하고 독립했지만 ‘동일한 사업을 하는 업종’이라는 이유로 북한과의 사업 허가가 나질 않았다. 

힘들게 허가를 냈지만 또 다른 장벽이 나타났다. 식약처는  (유)산과들농수산이 신설회사라는 이유로 관능검사, 정밀검사, 무작위 검사 등의 규정을 적용했다. 중국산보다 18일 가량 빨리 들여오던 제품에 납기 차질이 빚어지면 신선도가 떨어진다. 

김 대표는 “마늘은 수입품이 아니고 남쪽 마늘을 북쪽에 가서 가공한 후 그 마늘이 그대로 되돌아온다. 마늘을 반입하던 업체가 분리되었지만 같은 마늘이다. 다른 규정을 적용하는 것은 불합리하다”고 이의를 제기해서 문제를 풀었다. 

“이후에도 저를 모함해 고소고발한 사건으로 재판도 받았습니다. 사람이 무서워요. 앞으로 북한과 다시 협력사업을 할 기회가 온다면, 같은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으려 합니다.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나는 것처럼 정직한 사람들과 정직하게 일하고 싶습니다.” 

 

남북 농업협력, 국내 농가와 소비자 안전 지켰다. 

북한 공장 운영진과 처음에는 이견이 있었지만 나중엔 의사소통이 잘되었다. 산과들농수산은 손 마늘 공장 근로자들에게 출퇴근 수단으로 자전거 2천여 대를 공급했다. 

“출퇴근 목적으로 제공했는데 이 분들이 마늘을 자전거에 싣고 집으로 가져가 작업해 왔습니다. 임금을 고정시키지 않고 4인 1조로 킬로그램당 임금을 지급하는 제도를 북측이 받아들였습니다. 직원들은 하루 1인당 20kg 이상의 최상품 마늘을 생산해냈죠. 제가 젊은 시절 건설현장에서 일할 때 지게를 3층까지 몇 개 올려놓으라고 하면 저는 새벽에 나가서 일찍 끝내고 낮에 쉽니다. 북측 사람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때 손 마늘공장 직원들은 개성공단 직원보다 더 많은 수입을 올렸다고 한다. 

가장 보람 있었던 일이 무엇이었느냐고 묻자 김 대표는 “중국 마늘을 완전히 막아 낸 것이 가장 큰 보람”이라고 말한다. 인천 쪽으로 다이공을 통해 들여오던 중국마늘도 사라졌고, 마늘 수매가도 킬로그램당 3,000원 이상으로 올라 농민 소득도 올라갔다. 

북한 퍼주기라고 하는 비판에는 손사레를 친다. 남쪽 농민에 수매가로 지급한 돈이 400억 원 가량 되는데, 이에 비하면 북측 임금은 남쪽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낮았다. 더욱이 중국, 미국산 마늘을 몰아내고 우리 마늘을 공급해 식탁안전을 지킨 일은 돈으로 환산할 수 없다고 한다. 

 

초기 공장건설 때  현대아산과는 물류사업으로 인연을 맺었다. 공장 건설 자재와 설비를 북측으로 반입하는 것을 목격한 현대아산이 ‘물류를 우리와 계약하자’는 연락을 보내 왔다. 현대아산 직원은 경연진의 지시라며 “우리와 물류게약을 하면 절반 가격에 해주겠다.”며 미리 써온 계약서를 보여주었다. 계약기간은 2년이라고 했다. 

“저는 싸게 하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절반 가격으로 하지 말고 정상 가격으로 하자. 마늘 사업에서 수익을 내야지, 물류가격을 낮출 생각이 없다. 가격을 덤핑하면 나중에 서로 불편해진다. 대신 계약기간을 7년으로 하자’고 제안했더니 현대 측에서 7년 계약을 받아주겠다고 했습니다.”

김용관 대표는 “갑을 간의 거래도, 남과 북의 사업도, 농민과의 관계도 서로 윈윈하는 ‘상식’ 선에서 해야 하고, 또한 자기 분야에서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믿는다. “남을 죽여야 내가 산다.”는 생각을 버려야 농민과 소비자가 살고, 남과 북이 모두 잘된다는 것이다. 

그런 믿음을 지키느라, 마늘 사업을 하면서 적이 많아졌고 모함도 많이 받았다.   

“농협 조합과는 많이 다퉜지요. 우리 회사가 마늘 값을 올리면 전반적인 마늘 수매가가 올라갑니다. 예를 들어 조합에서 킬로그램당 1700원에 계약재배를 하면 저는 농민과 직접 거래해서  2000원에 수매합니다. 조합 물량을 300원 싸게 공급받을 수 있지만 간접비용 때문에 2,000원 이상이 들어가지요. 조합에 유통마진이나 간접비용을 보태느니 차라리 농민들에게 직접 수매하는 길을 택했지요.”

김 대표는 농민, 농협, 유통기업이 모여 3자 토론을 해서라도 농민 수익률을 15%~20%까지 보장해야 한다고 말한다. 농민들은 1년에 1모작 하니까 먹고 살아야 하는데 그걸 왜 보장 못 하느냐는 것이다. 

 

마늘 이후, 무엇을 할 것인가 

하지만 잘 나가던 남북 마늘협력 사업은  2010년 이명박 정부의 5.24 조치 이후 중단되었다. 

정부에서는 “곧 재개되지 않겠느냐.”며 기다려보라고 했다. 마늘은 1년치를 미리 수매해두어야 하기에 70억 원 상당의 마늘을 수매해 두었다. “곧 재개될 것”이라는 기대와 달리 김 대표는 이후로 다시는 북한 땅을 밟지 못했다. (유)산과들농수산 역시 파산했다. 

파산 후 생활고뿐만 아니라 모함도 나돌았다. 보상도 거의 받지 못했다. 당시에는 “북한은 리스크가 크니 투자를 많이 하지 말라”는 정부 지침으로 금액을 낮춰서 신고한 업체가 대부분이었다. 

김 대표도 북측에 준 선급금 3억 원만 인정받았다. 지금 살고 있는 컨테이너와 건물, 주변 부지 등 회사 자산도 모두 채권자에게 넘어갔다. ‘북한에서 살다 온 사람’ 또는 ‘북한에 퍼주던 사람’이라며 죄인처럼 취급하는 눈길은 더 견디기 힘들었다.   

남북한 마늘 사업이 중단되자 마늘 가격은 다시 하락하기 시작했다. 북한산 가공마늘이 들어올 때는 기계마늘 업자와, 중국 수입 마늘 유통업자가 반대했다. 마늘 협력사업이 중단된 지 8년째인 2019년, 올해 마늘 작황이 좋은데도 가격 폭락으로 정부가 ‘시장격리’ 방식으로 수매량을 늘렸다. 하지만 농민들은 가격폭락에 책임지라며 정부를 상대로 ‘규탄 시위’를 벌였다.  

“남북협력이 재개되면 다시 시작하려고 합니다. 지난 정부가 남북관계를 단절시켜 기업인들이 큰 피해를 보았습니다.”

김용관 대표는 앞으로는 남북경협을 시작하는 기업들의 초기 설비투자비용은 정부가 기금 형태로라도 보조해주거나 신용대출을 해주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5.24 조치로 파산한 수많은 기업들은 지금 재기의 꿈도 못 꾸고 심지어 폐인이 된 경우도 있다. 김용관 대표도 사업이 단절된 후 어디에도 취직이 되질 않는다. 

김 대표는 사업이 중단되면서 겪은 충격을 씻고, 지난 일은 가슴 속에 묻어두기로 했다. 아직 몸과 마음이 건강하고 주위엔 김 대표를 격려해주는 사람들이 있다. 

“언젠가 기계로 깐 마늘이 손 마늘을 대체할 날이 옵니다. 정밀기계 개발과 설비투자 비용이 높아서 아직까지는 손 마늘에 의존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때까지는 북한과 손 마늘 협력이 최선입니다.” 

김용관 대표는 손 마늘이 기계 마늘에 밀려 경쟁력을 잃으면 다른 농산물, 다른 방법으로 남북협력을 얼마든지 발전시킬 수 있다고 한다. 시장변화에 따라 남북협력을 더 크게 발전시킬 수 있는 분야는 무궁무진하다는 것이다.  

“나는 농민 편을 들고, 농민이 내 편을 들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마늘 사업으로 큰돈을 벌면 교만해지기 쉽습니다. 농민을 위하고 남한과 북한이 함께 잘산다는 목적이 있으면 더 큰일도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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