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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남북나눔운동 이문식 공동대표 “화해에서 평화로”
[인터뷰] 남북나눔운동 이문식 공동대표 “화해에서 평화로”
  • 백찬홍 편집위원
  • 승인 2019.09.30 15: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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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나눔운동 상임공동대표 이문식 목사 인터뷰

 

아가페는 그리스도의 ‘절대적인 사랑’을 뜻하는 신학용어다. 사랑이 필요한 곳이라면 어디든지 찾아가는 기독교의 소명의식은 ‘아가페’에서 출발한다. 

사단법인 남북나눔운동(이하 나눔운동)의 북한 지원 역사가 짧지 않다. 1993년 창립 이래 26년간 약 1,500억 원을 지원해 민간단체 중에서는 가장 많은 지원 실적을 기록했다.

더욱이 나눔운동은 교계의 거목 홍정길 목사를 중심으로 ‘보수와 진보’의 구분법을 따지지 않고 힘을 합해 인도적 지원 사업을 전개해 왔다.  

나눔운동 창립 당시 기획실장을 맡아 사무총장을 거쳐 현재는 상임공동대표를 맡고 있는 이문식 목사(광교산울교회 담임목사)를 만나 나눔운동이 걸어온 길과 교류협력의 필요성, 향후 전망을 들었다. 

3.1운동처럼 불붙은 나눔운동 

“남북나눔운동은 김영삼 정부 시절인 1993년에 발족했습니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 이하 NCC)는 1988년 노태우 정부때부터 북한 조선그리스도연맹(이하 조그련)과 교류해 왔습니다.” 

시초는 NCC 권호경 목사가 1992년 1월 북한을 방문해 조그련 고기준 서기장과 함께 김일성 주석을 만나면서부터였다고 한다.

이때 권 목사는 “동서독이 통일이 될 때 교회가 주역을 담당했는데 그걸 본받아 남북교회가 통일에 좋은 역할을 했으면 한다.”면서 남북 나눔운동 이야기를 꺼냈다.

그 자리에서 확답을 듣지 못했지만 거절하지도 않았기에 권 목사는 돌아와서 일단 남북 기독교 교류를 추진하기로 했다.

NCC는 이 즈음 민주화의 과제를 달성하고 ‘통일운동’으로 방향을 설정하고 있었다. 그러나 선뜻 북한 지원에 나서는 교계 지도자가 없었다.  

“홍정길 목사님이 수락하셔서 3.1운동처럼 보수, 진보가 함께 참여하는 전 교회적, 전 사회적 운동으로 확산되었습니다. NCC 통일국장이었던 김영주 목사가 사무국장, 제가 기획실장을 맡았습니다.” 

홍정길 목사와의 만남

홍정길 목사와의 만남이 궁금했다. 

“홍정길 목사님과는 IVF 활동을 통해 만났습니다. 당시 숙명여대 사학과 이만열 교수님이 ‘이문식 목사와 함께 하면 NCC 쪽과 대화가 잘 될 거다’라고 추천했고, 홍정길 목사님은 ‘이왕 일하려면 우리교회로 오는 것이 좋겠다.’고 하셔서 남서울교회 협동목사로 가게 되어습니다.” 

이후 남북나눔운동은 적십자사 다음으로 가장 많은 대북 지원을 하는 민간단체로 자리매김했다.

남북 나눔운동이 사업을 시작할 때쯤 1차 북핵 위기로 북한과의 접촉이 불가능할 때였지만 그래도 국제사회의 봉쇄를 뚫고 만나보기로 했다. 처음엔 조선그리스도연맹을 통한 직접 지원이 아닌 간접 접촉이 이뤄졌다. 

“긴장된 상황이어서 북한도 평양의 관계자가 나서지 않고 지역단위 인민위원회를 통해 간접적인 방법으로 접촉했습니다. 우리도 연변에 회사를 만들고 조선족 출신 장로님이 대표를 맡아 구상무역 방식으로 진행했습니다.

당시 북한은 식량난이 심각해서 옥수수 가루를 중심으로 13회 지원했습니다. 이 사업 주체가 나눔운동이라는 사실은 북한 당국이 알고 있었죠.”

이후 북한 ‘조선그리스도연맹’이 나눔운동의 파트너로 나섰다. 조그련은 북한 내 위상이 낮아서 북한 민화협 내 작은 조직에 불과했다고 한다.

이문식 목사는 “기독교 단체 간의 교류가 북한 사회에 널리 알려지면 조선그리스도연맹의 북한 내 위상도 높아지지 않겠느냐”는 기대가 있었다고 한다. 이후 실제 조그련의 위상이 높아졌다고 한다. 

“조그련 책임자 중에 한 분이 최고인민회의 상무위원이 되었습니다. 북한 적십자를 제외하고 가장 많은 실적을 쌓았으니 북한당국도 조그련을 인정했죠.

처음에는 옥수수가루, 감자 등 식량지원을 했는데 군용 전용을 우려하는 여론을 의식해 어린이들을 위한 분유로 품목을 바꾸었어요. 어린이 분유 지원은 각계 호응을 받아 크게 성공했습니다. 보수적인 분들, 여러 다른 단체들도 앞다투어 동참을 했습니다.”

이 무렵 우후죽순으로 북한지원단체가 늘어나자 사업 효율성을 위해 50여 단체가 대북협력민간단체협의회, 즉 북민협을 결성했다.

4개 분과로 나뉘어 나눔운동은 농촌분과위원장을 맡았다. 이 때부터 다양한 농업 단체들이 농촌분과위원회 대북지원사업에 참여해 함께 일했다. 

나눔운동은 ‘농촌주거환경개선사업’의 일환으로 황해북도 봉산군 천덕리에 주택 100채를 지었다. 그 뒤로  500채까지 늘어났다.

이 즈음 북측 파트너는 조그련이 아닌 민경련(민족경제연합회)으로 바뀌었다. 

황해북도 천덕리 농촌 주거환경 개선 사업

“농촌주거환경개선 사업은 협력사업이었습니다. 주민 1인당 월 50~60달러씩 지급하는 방식으로 북한 주민이 사업에 참여했죠.

그 외에도 각종 종자와 수해복구를 위한 복구자재를 지원하고 유치원, 탁아소도 세웠습니다. 단순 지원과는 다른 협력사업으로 발전했고 지원규모도 가장 컸습니다.” 

천덕리 초등학교 터닦이 공사를 마칠 무렵, 2010년 정부가 모든 교류협력 사업을 중단시켰다. 나눔운동의 남북교류협력 사업도 중단되었다.

이문식 목사는 지난 10년 간 교류협력의 경험을 쌓은 인재들이 하나 둘 빠져나간 것이 가장 가슴 아프다고 한다. 

“지원사업은 사람이 하는 일이라서 축적된 역량이 중요합니다. 이 기간 대북지원단체들의 역량이 10분의 1로 줄어든 것 같습니다. 저희는 공백 기간 동안 베트남이나 캄보디아 개발협력사업을 진행해서 그나마 다행입니다.”

과연 북한에서 종교적 소통이 가능했는지, 북한의 기독교가 실재하는지에 대해서 사람들은 궁금해 한다.

가짜 예수쟁이, 속은 빨갱이에게 가서 무얼 하겠느냐는 질문을 많이 받았다. 

이문식 목사는 “비난하는 내용이 맞을 수 있다. 하지만 북한에서 기독교에 대해 잘 아는 단체가 조그련이다. 복음을 접하는 접촉점을 소중히 여기고 무조건 만나고 교류해야 한다.”고 설명한다.  

사마리아 사람에게 베푼 이웃사랑이 그리스도의 지상 명령 중 하나이고, 나눔운동은 이웃 사랑의 출발점이라는 것이다.    

북한 취약계층 돌보는 조그련 되길 

평양 봉수교회의 분위기가 궁금했다. 

“봉수교회 예배에 참석하면 설교는 안 시키고 인사만 시키더군요. 담임목사인 이성봉 목사는 김일성 항일유격부대에 어린 나이부터 참여했어요.

혁명 원로인데 김일성 주석이 기독교적 집안에서 자랐으니 ‘교회를 맡으라.’고 해서 맡게 되었다고 합니다. 당연히 신학을 할 수 없었죠. 설교가 쉽지 않았던가 봅니다. 저에게 설교집을 보내달라고 해서 여러 권 보내드렸습니다.”

이 목사가 설교집을 보내 준 후 “평양의 이성봉 목사 설교가 더 좋아졌다”며 활짝 웃는다.  

이문식 목사는 북한에서 변화가 일어나고 있지만 개방은 느리게 진행될 것으로 예상했다. 

“조그련의 영향력도 많이 줄어들었습니다. 하지만 북한의 당이나 군의 손이 미치지 못하는 곳에 조그련이 활동할 수 있습니다. ”

나눔에서 평화로 

‘나눔운동’의 교류협력 사업 전망에 대해 물었다. 또 최근 북한이 인도적 지원을 거절하는 배경도 궁금했다.   

“현재 북한의 민간경제는 미국의 제재와 남한의 지원 없이도 매년 성장을 했다는 보도가 나왔지요.

이제는 교류협력 방식이 바뀌어야 합니다. 예전처럼 어린 코흘리개들 사진 찍어서 북한의 참상이라고 보도하는 것이 북한의 자존감을 무너뜨린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이 목사는 남북이 ‘따뜻한 시선’을 교환하는 인간적 연대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고 한다. 교류활성화를 통한 민족 동질성 확보가  첫 단계라고 한다. 

남한 청소년들이 아무 거리낌없이 금강산으로 가을 수학여행을 가고, 북한 학생들이 남쪽으로 유학 오고, 북한의 노동자들이 비자를 받아서 남한에 취업하는 관계까지 도달해서 사상과 이념의 장벽을 허물어야 한다는 것이다.   

“나눔운동이 지원한 물자의 분배투명성을 위해 교계 분들과 북한을 방문했습니다. 처음에는 6명, 10명이 가다가 규모가 커지자 버스 두 대로 갔어요. 가서 평양 시내 관광도 하고 우리가 지원했던 마을이나 농장을 자유롭게 방문했어요.

처음에는 꺼려했던 분들도 직접 체험하고 북한 사람들을 만나보고는 ‘별거 아니다’라는 생각을 갖게 되었고 굉장히 좋아 했습니다.”  

하지만 이문식 목사는 최근 ‘북한 지원’ 이야기조차 꺼내기 어려운 상황을 우려했다. 보수-진보의 극한 대립으로 중도적인 입장에서 남북문제를 말하기가 어려워졌다고 한다. 

“지금처럼 좌우로 극단적으로 나뉜 적이 없습니다. 진보든 보수든 한쪽에 서지 않으면 설 자리가 없는 사회가 되었습니다. 우리 사회에서 중도 세력이 약화된 것이 가장 큰 위기입니다.” 

북한의 개방이 진전되면 우리 교계의 역할이 늘어날까? 이문식 목사는 “그때 한국 기독교계가 남북교류를 하려고 하면 늦은 감이 있다. 뒤쳐졌다는 생각에 후회할 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남북나눔운동은 대립에서 벗어나 ‘변화’에 대비하고 있다. 이문식 목사는 “진영논리 사이에서 자리가 없어도 평화는 완성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민간 차원의 평화, 대중적인 평화, 중도적인 평화의 길로 가야 한다는 것이다. 

최근 이문식 목사는 남북협력을 ‘화해에서 평화로’ 진전시키는 과제에 주력하고 있다.

“화해는 개인적인 의미를 담고 있지만 평화는 구조적 문제를 다뤄야 해요. 이 문제에 대해 나눔운동도 여러 각도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남북나눔운동은 향후 단순 지원보다 개발협력에 주력할 계획이다.

 베트남 등에서도 경험을 쌓였다. 일회성 방문이 아니라 프로젝트형 협력사업이 전개될 때를 대비해 ‘국제협력전문가’도 양성할 계획이다.

ODA(공적 원조) 사업처럼 의료나 기술, 환경 등 다양한 분야의  인재를 육성해 북한과의 협력사업에 접목하겠다는 것이다. 나눔운동이 수행한 황해북도 천덕리 주택 사업의 경험도 있다.  

숲으로 이루는 평화  

“평화아카데미를 설립했습니다. 북한의 변화가 진행되면 개인의 경험보다 전문가 영역의 협력이 필요합니다. 평화연대의 경험을 시민사회에 나눠서 역량을 키우는 데 목표를 두고 있습니다.

북한 진출을 준비하는 기업인, 직장인, 학생들은 교육해서 피스메이커가 될 수 있도록 해볼 생각입니다.”

이문식 목사는 군포에서 산울교회를 설립한 후 세 번이나 교회를 분립했다.  “한 그루 큰 나무보다 아름다운 숲을 이루겠다.”는 목회 철학에 따라 스스로 개척한 교회를 떠나 2013년 현재의 광교산울교회를 설립했다. 

광교산울교회 설립예배에서 홍정길 목사는 “한국교회의 위기는 예수를 따르는 삶을 다음 세대에 전수하는 데 실패했기 때문”이라며 “하나의 큰 교회보다 작은 교회 여럿이 더 낫다”고 강론했다. 

남북나눔운동은 26년간의 활동을 통해 남북 간 ‘화해’를 주도하고, 사회 저변에 스며들어 폭넓은 지원과 동참을 이끌어냈다. 

숲에 다양한 나무와 동물과 들꽃이 모여 살듯이 나눔운동이 ‘평화’를 담는 큰 숲이 되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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